수필가

[충청매일] 겨울 햇살이 따뜻하게 쏟아져 산에 오르기 좋은 날이다. 아내와 함께 출발하여 그다지 멀지않은 산에 도착했다. 예전 같으면 계곡물이 얼어있을 터인데 맑은 물이 구름을 담고 졸졸 흐르고 있다.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계곡을 따라 한참 오르다 쉬어가려고 물가 낙엽 쌓인 둔덕에 나란히 앉았다. 새소리 물소리 지나치는 바람소리가 삶에 지친 나를 깨운다. 포근한 낙엽 이불 위로 누웠다. 솜이불처럼 푹신하다. 따뜻하니 엄마 품처럼 느껴진다.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눈부신 하늘이다.

파란 하늘에 그림을 그려 보았다. 눈으로 그리는 그림이라 수시로 변한다. 나무 줄기에 가지를 그려 넣는다. 어느새 작은 새 몇 마리가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함께 그림이 된다. 햇빛에 눈이 부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이를 알기라도 하듯 구름 한 점이 달려와 살며시 가려준다. 구름도 그림에 합류했다. 그림이 점점 완성단계에 도달한다.

그림이 약간 허술한 느낌이 든다. 나뭇가지에 잎을 그려 넣어보았다. 녹음이 짙어지고 주변이 어두워진다. 새와 하늘과 구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잎을 너무 많이 그려 넣었나보다. 그래도 이젠 지울 수가 없다. 이왕 그려 넣었으니 당분간은 보고 즐기기로 했다. 나름대로 운치가 있어 보인다.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로 한줄기 햇볕이 그려진다. 봄에서 여름으로 흐르는 그림이 완성단계에 도달했다.

한 가지 색상으로 그린 그림이다 보니 단순하고 지루함이 함께 한다. 수정을 하려고 나뭇잎에 색을 입혀본다. 아기의 색동저고리처럼 이색 저색으로 채색을 한다. 멋있다. 신이나 더욱 진하게 입힌다. 화려하다. 바람에 나부낄 때 햇살이 비쳐 더욱 화사하게 반짝인다. 오 이제 제대로 완성되어 간다.

너무 두텁게 칠했나 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하늘에서 물감이 흘러 떨어진다. 새똥이 이마에 맞았다. 정신 차리고 그만 일어나라는 신호를 준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며 한잎 두잎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의 실수다. 아름답기에 신이나 자꾸 색칠을 한 것이 잘못되었다. 자꾸 떨어진다. 막을 재간이 없다. 그저 처분에 맡기고 바라보고만 있어야 할 따름이다. 이를 아는지 하늘빛도 엷어지며 높아진다.

나무엔 잔가지들만 매달려 있다. 그래도 새들은 날아와 앉는다.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뭇가지 위에 하얀 물감을 얹어보았다. 쓸쓸함이 사라졌다. 흰색이 녹아내리지 않게 바람을 차게 그렸다. 그 위로 여객기 한대가 날아들어 분위기를 바꿔 놓는다.

한참을 그렇게 그림에 빠져있다 보니 등이 축축하다.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처럼 우리의 인생이 또 저만큼 흘러갔나 보다. 그림이 시간의 흐름에 변해가듯 우리 인생도 빠르게 흐르며 변해가고 있다.

허전한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산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내려가기로 했다. 가벼워야 할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이를 알기라도 하듯 계곡물이 함께 흐르며 동행한다. 내가 빠르게 걸으면 빠르게 흐르고, 천천히 걸으면 천천히 흐른다. 인생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흐름의 속도에 따라 흐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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