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충청매일] 성곽 위에 난 등산로에 바로 올라섰다. 길을 걸으면서 좌우를 살펴보니 토성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수목이 우거져 있지만 좌우가 언덕처럼 경사가 급하고, 길 가운데 돌이 많이 눈에 띈다. 그리고 돌 사이에서 가끔 기와조각도 보인다. 등산로의 너비는 약 2m~2.5m 정도 되지만 풀이 우거진 부분까지 하면 더 넓다고 할 수도 있다. 등산로가 바로 평탄한 성곽 길이다. 성곽 길을 걸으며 보이는 양면은 사람의 힘으로 쌓은 흔적이 뚜렷하다.

평탄하던 등산로는 급경사를 만난다. 급경사 길을 오르면 와우산 수도원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이곳에 평평하고 넓은 터가 있는데 여기에는 기와조각이 다른 곳보다 더 많이 널려 있다. 여기가 서문지라고 한다. 기와조각들은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에 있던 건물들이 고려시대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9년(689년)에 쌓은 서원경성이 이 성일 가능성이 있고 또한 고려태조 2년(919년)에 태조 왕건이 청주에 행차하여 성을 쌓았고 같은 왕 13년(930년)에 다시 행차하여 나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 두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신라 때 쌓은 성을 고려 태조가 개축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발견되는 흔적들은 고려시대 축조되었다는 이야기가 맞을 것이다.

건물지를 지나면 다시 경사로가 나온다. 경사로에도 크고 작은 기와조각이 쌓이다시피 했다. 기와조각들은 대부분 무늬가 없다. 민무늬 와편 속에 줄무늬 조각이 눈에 띠는데 이것은 기와조각이 아니라 토기의 조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성곽 주변에 세워진 건물들은 대부분 같은 시대의 건축되었을 테니 같은 민무늬이고 그와 다른 토기는 또 그 시대의 것이므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기와조각이 많이 보이니까 토성 위에 담을 쌓고 담을 기와로 이은 이른바 여장형 공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한 보고에 의하면 축성할 때 기초부분에 대석재를 이용하고 성벽 바깥쪽에 정연한 석축으로 1.35m를 쌓은 다음 안쪽으로 60cm정도 조잡한 석재를 채우고 다시 흙을 채우고 다지는 전형적인 외축내탁(外築內托) 방법으로 쌓은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또 토성 위에 다시 돌로 쌓은 여장 형태가 발굴됐는데, 이러한 형태는 전국적으로 그 유례가 없다고 한다. 그만큼 아우산토성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성곽 길을 따라서 송신소 쪽으로 계속 올라갈수록 와편은 더 많고 경사로는 바깥쪽으로 성곽의 모습이 뚜렷하다. 송신탑에서 또 한 번의 나무 계단 길을 올라가면 너른 대지가 보이고 청주대학교 후문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게 된다. 여기가 북문지라고 한다. 북문지에서는 성 안으로 통하는 찻길이 나있고 이곳을 통해서 차량이 송신탑으로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도 여기까지 차량으로 이동해서 우암산 정상을 가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이곳이 바로 천흥사 터라고 하는데 여기 샘이 있으나 폐쇄되어 물은 나오지 않았다.

한 구비만 올라서면 와우산성 길은 문득 끊어지고 정상으로 착각할 정도로 높은 곳이다. 여기서 성은 갑자기 동쪽으로 틀어 용담동 쪽으로 내려가는 산줄기를 따라 당산토성으로 향한다. 정상 부근에 또 하나의 송신소가 있고 이곳에 홍천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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