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뭐 다를 게 있느냐. 나도 대궐에 높은 양반들한테 뭐라도 바쳐야 내 자리를 보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미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다. 양반들이 출세하는 길인 과거제도가 있다하나 무용지물이 된 지 이미 오래전이었다. 학문을 열심히 갈고 닦아 벼슬길로 나가는 것보다 누구 줄을 잡느냐가 더 빠르게 벼슬아치가 되는 길이었고, 얼마나 더 많은 돈을 약채로 쓰느냐에 따라 자리의 등급이 달라지는 세상이었다. 이현로 역시 탄호대감에게 줄을 대 집과 전답을 처분하여 벼슬을 산 위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탄호대감의 명이라면 절대로 거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전 재산을 처분하여 벼슬을 샀으니 그것을 복구하려면 벼슬자리에 오랫동안 붙어있어야만 했다. 벼슬자리에서 떨려나지 않으려면 포수 따라다니는 사냥개처럼 목숨이 날아가더라도 충성을 보여야만 했다. 이현로는 탄호대감의 개 처지였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쫓겨날 수 있었고, 갖다 바친 재산은 영영 찾을 길이 없었다.

“영감이나 고을민이나 궁하게 살기는 매일반이구려.”

“내가 부사라고 매일 동헌에 앉아 고을민들에게 호통만 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 역시 윗전들 눈치를 살피며 주눅 들어 사는 건 마찬가질세.”

미향의 측은한 눈빛에 이현로는 체면이고 나발이고 자기 속내를 털어놓았다.

“영감, 탄호대감이 무작정 오천 냥을 바치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어요. 무슨 근거가 있으니 그 큰돈을 바치라 하는 것 아니겠수. 도대체 그게 뭐여요?”

미향이거 다그치듯 물었다.

“관아에는 세곡 말고도 위급 시에 쓰기위해 비축해놓은 곡물이 있다. 그건 나라의 큰 환란이 닥치기 전에는 누구도 건드릴 수가 없다. 그런데 나라에 큰일이 생겼으니 그것을 올려 보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올려 보내면 될 것 아니어요?”

“그렇게 간단하면 뭐가 문제이겠느냐?”

“관아 창고에 쟁여 있는 것 보내면 되지 뭐가 간단치 않다는 말씀입니까?”

“그게 없으니 문제 아니더냐?”

이현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라에서 쓸 곡물이 어디로 갔다는 말씀입니까?”

“인쥐들이 다 먹어치웠다!”

“인쥐들이라면?”

미향의 물음에 이현로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 말문을 열었다.

“내가 청풍에 와보니 이미 창고는 반도 더 비어있었다. 내가 서리들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이전부사들이 꺼내 쓰고, 관속들이 장사꾼들에게 풀어 돈놀이를 해먹고, 굶는 고을민들에게 고리로 꿔주고 해서 치부책에만 창고에 곡물이 채워져 있더구나.”

“그렇다면 영감 잘못만도 아닌데, 그들을 탄호대감에게 고변하지 그러십니까”

“나도 그 곡물을 꺼내 가용에도 쓰고, 윗전에 올리기도 했으니 어떻게 고변을 한단 말이냐. 또 전임자들이 그렇게 해먹어온 것을 탄호대감인들 모를 리 있겠느냐?”

“그걸 알면서도 영감에게 억지를 쓴답디까?”

“언제 윗전들이 아랫사람들 사정 봐주며 일을 하더냐. 어떻게든 그들은 자기들 욕심만 채우면 되지. 관아에서 고을민들 형편 봐가며 사정을 봐주더냐? 온갖 명목을 만들어 주리를 틀어 받아내고 말지.”

“하기야! 그래 영감은 어찌할 작정이오?”

“무슨 수가 있겠느냐? 모가지 잘리지 않으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탄호대감의 비위를 맞춰야지!”

“무슨 방도가 있사옵니까?”

“지금 청풍도가 김주태 주리를 틀고 있다.”

“김주태는 무슨 죄가 있답디까?”

“김주태도 관아 곡물을 가져다 고을민들에게 고리채를 놓았단다. 내게는 비어있는 창고를 채워놓겠다며 빌려간 곡물인데 아직 원전도 갚지 못하고 있다. 가을 추수철이나 돼야 뭐라도 받지, 지금 고을민들한테 뭘 받아올 게 있겠느냐?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대궐에서 큰일을 벌여 돈과 곡물을 올리라 하니 보통 일이 아니구나.”

이현로는 고을민들이 허기에 시달리고 있는 고통보다도 탄호대감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자신에게 닥칠 화를 더 걱정하고 있었다.

“청풍도가 김주태 똥줄이 타겠구려.”

“그뿐이 아니다. 지금 김주태는 사면초가에 처해있다.”

“사면초가라니 그건 어인 말씀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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