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오랜 옛날 구녀산 정상에 아들 하나와 아홉 딸을 가진 홀어미가 있었다. 남매들은 생사를 걸고 내기를 하였다. 아홉 자매가 구녀산정에 성을 쌓는 동안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기로 했다. 내기에서 지는 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으로 약속했다.

자식들의 내기를 비탄한 마음으로 바라다보고 있던 어머니는 말리다가 체념하고 말았다. 내기를 시작하고5일만에 서울 간 아들은 돌아올 기미가 없는데 딸들의 성 쌓기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아들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커다란 가마솥에 팥죽을 한 솥 끓여 딸들에게 먹고 하라고 권했다. 이에 아홉 딸들이 팥죽을 먹기 시작했다. 팥죽이 어찌나 맛이 있었는지 수저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 사이에 아들은 발가락에 피를 흘리며 당도했다.

내기에 패한 아홉 딸들은 그들이 쌓아올린 성벽에 올라가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아홉 누이의 시체를 앞에 놓고 부질없는 불화로 목숨을 잃게 한 동생은 크게 뉘우치고 그곳을 떠나 개골산으로 돌아가 누이들의 명복을 빌며 다시는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홀어머니는 먼저 죽은 영감의 무덤 앞에 아홉 딸을 묻고 외롭게 살다가 죽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영감 곁에 홀어머니를 묻어 주었다. 

이 전설은 우리나라 산재해 있는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이다. 비극적 결말을 가진 이 이야기는 성이 완성된 후에 근동 사람들에 의해 구전되면서 가감되어 모든 이들의 마음을 울렸을 것이다. 임존성의 묘순이 바위, 부강 노고산성의 노고할미 이야기가 모두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런 유형의 전설이다. 구녀성 전설은 구라성에서 구려성, 구녀성으로 명칭이 변천되는 과정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고구려산성이라는 뜻에서 구려산성이었다가 고구려와 신라의 산성이란 뜻으로 구라산성이 되고 구려산성이 구녀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구녀산성이란 명칭이 생기니까 아울러 '구녀九女'란 말을 토대로 이 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전설이 구전되면서 주변에 알려지니 자연스럽게 구녀산성이라 불리어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 아닐까 한다.

청주 상당산성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삼국 세력 확장의 각축장이다. 세력 우열에 따라 주인이 바뀌었다. 처음엔 이곳이 백제 땅이었다. 백제는 다루왕 36년(AD63) 이곳을 차지해 버린다. 그 후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고구려의 손으로 넘어간다. 백제는 고구려의 세력을 피해 한성백제 시대를 접고 웅진으로 천도한다. 신라도 단양의 죽령 이북 땅을 고구려에게 잃었다. 그러다가 신라 진평왕대에 이르러 진천에서 태어나 이곳의 지형을 잘 아는 김유신 장군이 낭비성에서 고구려 군사 5천명을 베고 차지하는 바람에 신라 땅이 된다. 후백제 시대에도 견훤과 궁예가 구녀성을 빼앗고 빼앗기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만큼 견고하게 쌓게 되었을 것이다.

내려오는 길은 땀에 범벅이 되어 기진맥진했다. 단순한 등산과 다르게 산성답사는 진을 빼앗기는 기분이다. 낮은 산에 있는 무너진 성을 돌아보고 내려오는데도 탈진 상태가 되곤 했다. 딱한 영혼들에게 술 한 잔 베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옹색한 나의 주변머리도 탈진을 알긴 아는구나. 맑은 술 한잔으로 짓는 복이 있음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나의 좁은 아량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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