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거울: 거울을 바라보는 여성들
(2) 비너스와 거울
루벤스·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뒷모습의 비너스 묘사
거울이라는 훌륭한 장치로 앞모습까지 보여주는데 성공
거울 통해 생동감 있는 표정 vs 흐릿한 비너스 얼굴 그려
1914년 여성참정권 옹호론자가 칼로 ‘로커비 비너스’ 훼손

왼쪽부터 페타 파울 루벤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 1615. 디에고 벨라스케스 ‘로커비의 비너스’ 1647-51. 매리 리처드슨에 의해 훼손된 벨라스케스의 비너스 1914.
왼쪽부터 페타 파울 루벤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 1615. 디에고 벨라스케스 ‘로커비의 비너스’ 1647-51. 매리 리처드슨에 의해 훼손된 벨라스케스의 비너스 1914.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출근길 대중교통 안에서 화장파우치를 펼쳐놓은 채 거울을 보고 얼굴에 분을 두드리는 여성들은 “쯧쯧, 여자들이란”하는 빈축을 산다. 아마도 얼굴에 이것저것을 바르고 종국에는 완벽한 변신의 모습으로 차에서 내리는 여성들은 누가 자신을 보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생각일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같은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 타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피해를 주는 일은 아니지만, 왠지 혐오감을 일으킨다. 특히 여성들보다는 남성들에게 그런 것 같다. 화장품 냄새가 버스 안에서 진동하고 분가루가 날리는 등의 행위는 사실 좀 조심해야 할 행동의 영역인 것 같기는 하지만, 나란히 앉은 자리의 ‘쩍벌남’이나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이 있는 만원 지하철에서의 성추행에 비하면, 거울을 보고 얼굴을 두드리는 정도가 그렇게 크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게다가 요즘은 ‘탈코르셋’, 즉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용모를 맞추기 위해 코르셋을 입거나 화장을 하거나 높은 구두를 신는 등의 행위로부터 스스로 벗어나자는 경향이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화두가 되는 중이다. 이러한 경향은 기존에 여성들에게 기대되었던 어떤 모습이 다른 누군가의 시선에 자신의 신체를 맞추어가는 행위였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울을 보는 행위는 남성이나 여성 모두가 하는 것이지만 여성이 주로 거울을 끼고 살면서 수시로 자신의 얼굴을 다듬는 것은, 거칠게 말하면 그렇게 하도록 기대되어 왔던 사회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회학적 연구의 영역이므로, 여기서는 다시 미술사 속 ‘여성과 거울’에 대한 논의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여성이 거울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허영’의 가치가 들러붙는다는 것을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익명의 누드의 여성이 거울 속 자신의 얼굴에 정신이 팔려 시간이 가는 줄고 모르고 늙어 죽을 것이라는 운명은 생각지도 못한 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장면은,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것이었다. 지상에서 누리는 것들은 순식간에 끝나고 죽음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에 거울을 보며 자신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여성은 헛된 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하지만 익명의 여성이 아니라 유명한 여성, 비너스(아프로디테)를 그릴 때도 화가들은 거울을 등장시켜왔다. 비너스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으로 고대 그리스의 신상으로도 제작된 바 있고,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의 개화와 더불어 화가들이 의욕을 가지고 도전한 주제이기도 하다. 합법적으로 여성의 누드를 그릴 수 있는 테마인데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화면 속에 만들어낸다는 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입장에서는 대단히 흥미진진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비너스의 탄생에 초점을 맞춘 이들은 비너스가 바다로부터 육지로 다가오는 순간을 그려왔고, 또 다른 이들은 아들인 큐피드와 함께 있는 비너스를, 혹은 비너스가 거울을 보고 자신의 미모를 바라보는 모습을 그렸다.

1615년 루벤스가 그린 ‘거울을 보는 비너스’는 뒷모습의 비너스이다. 붉은 벨벳 의자에 걸터앉아 뒷모습의 누드를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비너스의 머리칼을 흑인 하녀가 매만져주고 있다. 반짝이는 금발의 머릿결은 그야말로 실크처럼 보드라워 보인다. 전면에 보이는 것이 뒷모습이지만 비너스의 아름다운 얼굴도 명확하게 볼 수 있는데, 그녀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거울은 날개를 가진 어린 큐피드가 힘껏 들어 올리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비너스의 얼굴 생김새를 낱낱이 볼 수 있는데, 그녀는 발그레한 볼을 하고 선명한 갈색 눈빛과 매끈한 콧날을 가진 아름다운 얼굴인데다가 자신의 미모에 만족한 듯 입술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뒷모습만을 그리기에는 얼굴을 생략하기 아쉬웠던 화가는 거울이라는 훌륭한 장치를 사용해 뒷모습과 앞모습을 모두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비너스는 아름다움의 화신이지만 여전히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가꾸는 여성이다. 거울 속의 자신에 심취해 있기 때문에 관객인 우리는 심리적 부담 없이 뒷모습의 아름다움을 구석구석 감상할 수 있다. 거울을 든 큐피드조차도 시선이 비너스의 몸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너스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비너스 그림으로 미술사적으로만이 아니라 사회사적으로도 유명세를 탄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로커비의 비너스’이다. 벨라스케스의 비너스 역시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큐피드가 든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고 있다.

루벤스의 비너스처럼 가까이 댄 거울에 얼굴을 요모조모 비추어보기보다는 나른하게 누워 다소 먼 거리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한 팔로 머리를 받치고 있는 편안한 모습에 비하면 그녀의 뒷모습은 온 몸의 굴곡이란 굴곡은 다 보여주고 있다. 한쪽이 약간 올라가 있는 침대에 기대어 더 잘 보이는 둥근 어깨와 잘록한 허리, 강조된 둔부에서 다리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선은 그야말로 뒷모습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이데아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벨라스케스 비너스가 보여주는 거울 속의 얼굴은 어쩐지 애매하게 보인다. 루벤스의 비너스가 육감적인 뒷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생동감 있는 표정의 얼굴을 보여주었던 것과는 매우 다르다. 실상 루벤스 그림 속에서 거울은 비너스의 뒤편에 설 수밖에 없는 관객에게 얼굴까지도 보여주는 서비스처럼 느껴졌으나, 벨라스케스의 비너스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얼굴 세부의 생김새가 어떤지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알기 어려운 것이다. 거울 속 얼굴에서 호기심을 채우지 못한 관객은 다시 한 번 그녀의 뒷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뒷모습만으로 승부해도 벨라스키스의 비너스를 능가할만한 아름다움을 찾기는 힘들 것 같다. 회화의 지존인 벨라스케스의 기량에 힘입어 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뒷모습은 여러 비너스 그림들 가운데 확고한 미술사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벨라스케스의 비너스는 뜻하지 않은 테러에 직면하고 이는 큰 사회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1914년 3월 10일, 이 작품을 전시하고 있던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 매리 리처드슨이라는 여성이 고기 써는 식칼을 들고 가 비너스의 등판을 칼로 무자비하게 그어버린 것이다. 난도질당한 그림은 움푹 패이고 찢어졌으며, 이러한 반달리즘의 댓가로 매리 리처드슨은 육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물론 이 작품은 면밀하게 보존수복되어 그 원형을 여전히 감상할 수 있다. 매리 리처드슨의 행위는 당시 영국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바라보아야 이해가 가능하다. 영국 여성들은 이 당시 여성참정권 운동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었고(백년 전까지 영국 여성들은 투표도 할 수 없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였던 에밀린 팬커스트가 체포되자 그에 대한 항의로 이 같은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여성참정권과 이 그림이 무슨 관계이기에 벨라스케스의 비너스는 이러한 수난을 당해야 했을까. 매리 리처드슨은 “현대사에 가장 아름다운 인물인 팬커스트를 파괴한 정부에 대한 항의로서, 신화적 역사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그림을 파괴하려고 시도했다”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그녀는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의 권리에는 뒷전이면서 아름다운 육체를 그린 그림 속 여성을 찬양하는 사회적 인식의 간극에 상처를 내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여성에 대한 공격처럼 보일 수도 있는 사건이지만 매리 리처드슨은 여성이 아니라 사회가 바라보는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문화적 테러가 이러한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명작이라는 찬양을 받으며 무수하게 걸려 있는 여성의 누드 작품들을 여성의 시각으로 다시 바라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거나 거울 앞에 누워 나른하게 자신을 감상하는 그림 속 여성은 진짜 여성이 아니고, 그러한 여성을 보고 싶어 하는 남성시선의 산물이라는 관점의 계기 말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