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충청매일] 우스갯소리지만 고향을 물어오는 이에게 나의 생가는 웃덕디라고 대답한다. 생가라는 명칭은 유명인이 태어난 집을 말한다. 누구누구 생가 하면 역사적으로 기릴만한 인물이 태어난 집을 말한다. 주로 죽은 이의 고향, 그가 태어난 집에 붙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후대가 기릴만한 선대를 위해 그가 태어난 집을 보전하고 다른 이에게 그의 업적을 알리기 위함이다. 유명하지도 않고 아직 팔팔하게 살아있는 내가 나의 생가 웃덕디를 이야기함은 일종의 언어유희이지 내가 나를 기리자는 오만방자함이 아니다.

충북 음성을 가다 보면 반기문생가라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반기문은 한국인 최초로 UN사무총장을 지낸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음성군에서는 음성을 상징하는 또는 음성을 알리는 인물로 반기문만 한 사람이 없기에 아직 살아있는 이에게 생가라는 무거운 짐을, 심지어 반기문 마라톤대회까지 유치하면서 홍보에 열을 올리는지 모른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충주에 신경림 생가가 있다. 신경림 시인은 충주를 대표하는 시인임에는 분명하지만, 충주시는 어쩌자고 생가를 만들어 산 사람을 죽은 자로 대우하는지 모르겠다. 전국 곳곳을 다니다 보면 누구누구 생가, 누구누구 묘를 알리는 이정표가 많다. 고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양한 인물들은 지자체의 관리하에 우리와 함께 살아있다.

어느 해부터인가 전국에 문학관 건립 열풍이 일었다. 일제 강점기를 포함해 한국문학사에 이름 석 자 올라간 인물치고 문학관 건립이 안 된 사람이 없다. 문학제와 문학관 건립 열풍은 현재 진행형이며, 심지어 살아 있는 이의 문학관까지 지어가며 지역 알리기에 심혈을 기울인다. 마치 문학관이 지역 경제 살리기의 한 방법인 것처럼 말하는 이도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찾는 이 없이 흉가로 변해가는 수많은 문학관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다고 모든 문학관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문학관 건립은 시공사의 역할이 가장 크다. 일단 건물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전국에 있는 생가는 천편일률적으로 똑같다. 초가집과 마당 옆 우물, 싸릿담에 감나무 한 그루, 아 이 얼마나 서정적인가. 문학관 내부는 더 심각하다. 질 좋은 판에 빼곡히 적힌 글씨들, 낡은 책 표지들, 최첨단 영상과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글자들. 수십억이 족히 드는 건립비용은 다 어디에 사용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문학관에 시인은 없고 두꺼운 벽돌과 화려한 지붕만 있을 뿐이다.

청주에는 문학관이 없다. 그것이 부끄러운 일일까. 절대 아니다. 다른 지역에 부끄러워 문학관을 지어야 한다는 논리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뿐 아니라 지자체의 명분으로 문학관이 지어져서도 안 된다. 세상에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 많다지만, 적어도 글을 쓴다는 이들은 스스로 겸손하고 자신의 글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글 쓰는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글이 사랑받지 않겠는가. 문학에, 시에 관심 없는 이에게 꼭 알려야 할 인물이 있다 하여도 무턱대고 건물이나 짓고 고급 액자에 프린트물이나 전시하는 행위는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생가를 스스로 지켜 낼 것이다. 커다란 바위에 시를 새기는 일도, 동상을 세우는 일도 그럴듯하게 초가와 우물을 파는 일도 없을 것이다.(ps. 웃자고 하는 말을 다큐로 받아들이는 이 없길 바라며)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