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거울: 거울을 바라보는 여성들
(1) 여성과 거울의 조합은 ‘허영’과 ‘어리석음’
한스 멤링 ‘허영’, 죽음·악마 패널 사이에 거울을 든 여인
그 행위만으로도 자신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취한 죄 범해
한스 발둥 그리엔 작품 ‘세 연령대의 여성들과 죽음’에선
삶의 과정 대표하는 인물 묘사…모래시계 ‘유한한 시간’ 상징
거울 속 자신에 취한 女, 지척에 다가온 죽음 사신 못 알아채
젊은 여성의 아름다운 육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 의미
인생 헛되게 탕진하는 인간 대표가 남성 아닌 여성으로 그려져

한스 멤링 ‘허영’ 1490년경.한스 발둥 그리엔 ‘세 연령대의 여성들과 죽음’ 1510. 파르미지아니노 ‘볼록거울에 비친 자화상’ 1524년경.(왼쪽부터)
한스 멤링 ‘허영’ 1490년경.한스 발둥 그리엔 ‘세 연령대의 여성들과 죽음’ 1510. 파르미지아니노 ‘볼록거울에 비친 자화상’ 1524년경.(왼쪽부터)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백설공주의 계모 왕비는 신비한 거울을 가지고 있었다. 그 거울은 대상을 비추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거울이었다. 왕비는 늘 거울 앞에서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아름답지?”하고 질문을 던졌고, “그건 바로 당신, 왕비님이지요”하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백설공주가 아이 티를 벗고 아름다운 소녀가 되자, 같은 질문에 대해 거울은 “왕비님도 아름다우시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백설공주에요”라는 청천벽력같은 대답을 들려주고야 만다. 이것을 계기로 왕비가 공주의 살인청부를 하고, 가까스로 살아난 백설공주가 우여곡절을 거쳐 왕자님을 만나게 된다는 스토리,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백설공주 이야기이다.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거울의 역할은, 단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판단을 하고 있다. 거울의 소유자가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거울은 정직하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인지를 판단한다. 하지만 거울의 견해에 분개하여 자신보다 아름다운 여성을 없애버리겠다는, 그리하여 자신이 아름다움의 정상을 다시 차지하겠다는 욕망은 왕비의 것이다. 왕비의 품성이 거울이라는 사물을 거쳐 발현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거울은 여성의 사물로 여겨져 왔다. 사실 거울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신화 속 인물 나르시서스는 남성이지만, 중세 이래 거울을 든 여성이 어리석음의 역할을 전담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거울을 든 여성들은 특정한 여성이 아니라 여성 일반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스 멤링(Hans Memling)이 그린 ‘거울을 든 여성’은 다폭제단화(polyptych)의 한 부분으로, 그 왼쪽 옆에는 ‘죽음’의 패널이, 오른쪽 옆에는 ‘악마’의 패널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죽음’과 ‘악마’의 사이에 있는 이 거울 든 여성의 주제는 무엇일까? 바로 ‘허영(vanity)’이다. ‘허영’은 라틴어 바니타스(vanitas)를 어원으로 하는데, 바니타스는 미술에 있어서 ‘이승에서의 삶이 가진 헛되고 공허함’을 주제로 하는 그림들을 설명하는데 사용된다.

한스 멤링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성은 옷을 입지 않은 누드인 채로 거울을 들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온 몸에 실오라기조차 걸치지 않은 여성이지만 잘 살펴보면 발에는 가죽 슬리퍼를, 머리에는 진주 장신구를 하고 있다. 붉게 물든 입술은 미소를 띤듯하지만 눈빛은 공허하게 초점을 잃었다. 거울을 든 각도 상 여성의 옆모습이 비춰야 하겠지만 정면에서 바라본 앞모습이 담겨 있다. 늘 앞모습을 비추어보던 얼굴의 형상이 붙박힌 듯 거울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이 여성은 웃음을 머금고 허리춤에 손을 올려 자신 있는 모습으로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만족스러워하고 있으며 거울을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증해주는 물건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죽음’을 이야기하는 해골의 형상과, 지옥에 떨어지면 만나게 될 ‘악마’의 형상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 그림은 모종의 경고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여성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특정 사연을 가진 여성이 아니라 거울을 바라보는 여성 일반이다. 여성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만족스러워하며 거울을 들고 있는 행위만으로도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고 ‘악마’의 괴롭힘을 당하게 될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취한 죄 말이다.

한스 발둥 그리엔(Hans Baldung Grien)의 ‘세 연령대의 여성들과 죽음’은 더욱 명확하게 이 주제를 그려내고 있다. 이 그림에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인물은 가운데 흰 피부를 가진 젊은 여성이다. 이 여성은 볼록거울을 들고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며 반짝이는 머릿결을 매만지고 있다. 여성의 다리 아래를 보면 뛰어다니는 어린 아기가 있다. 아기는 긴 천의 한 자락을 붙들고 장난을 치고 있다. 화면 오른쪽 절반의 비중으로 그려진 인물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거의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외양을 하고 있다. 배가 갈라져 마른 종잇장처럼 부스러져 가고 있고 몸의 군데군데 상처가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며, 눈은 움푹 들어가고 콧대도 허물어져 거의 해골의 형상에 가까울 정도이다. 그는 다름 아닌 죽음의 사신이며, 한 손으로 그러쥐어 번쩍 치켜들고 있는 것은 모래시계이다.

모래시계는 모래가 떨어지는 동안의 시간만을 측정하기 때문에, 그림 속에서 ‘유한한 시간’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되어 왔다. 뛰어다니는 아기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취한 여성도 지척에 다가온 죽음의 사신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노년의 여성은 모래시계를 든 죽음의 팔을 저지하고 있다. 물결치던 머릿결은 푸석하게 산발이 되어 있고 얼굴은 주름으로 뒤덮였으며 희고 탄력 있던 몸은 늘어져 육체적 아름다움은 노년의 여인에게 지난 일이 되고 말았다. 노년의 여인은 한 손으로는 모래시계를 든 죽음의 팔을 저지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젊은 여인이 든 거울의 뒷면에 손을 대고 있다. 젊은 여인에게서 거울을 치워버리려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이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기 때문에 별다른 설명 없이도 누구나 주제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세 연령대의 여인은 인간의 삶의 과정을 대표하는 인물들이고, 철없던 어린 시절을 지나 자신만만한 젊음의 시기를 거치지만 곧 노인이 되어 죽음을 바라보게 된다. 죽음은 인간의 짧은 인생 앞에 늘 가까이 다가와 있으나 젊은이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노인이 되어서야 젊은 날 누리던 헛된 즐거움을 반성하고 다가올 죽음의 채비를 하기에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깨달음은 여성의 삶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제의 그림들에서 인생을 헛되게 탕진하는 인간 대표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 그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것은 남성이었고, 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 역시 제분야에서 남성이 인간의 척도로 여겨졌건만, 허영에 찌들어 삶을 낭비하고 뒤늦게 후회하는 이 상징적인 그림의 주인공이 여성인 이유는 무엇일까 말이다. 게다가 거울을 보는 여성이 인간 일반의 인생을 낭비한 죄를 대표하는 것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여성 일반의 어리석음이 남성 일반의 어리석음보다 더 크다는 말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남성들 역시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본다. 화가들의 자화상은 거울을 통해 비추어 본 자신의 모습이다. 한스 멤링이나 한스 발둥 그리엔의 작품들에서처럼 볼록거울을 들고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고, 그것을 자화상으로 그린 남성 화가 파르미지아니노(Parmigianino)의 ‘볼록거울 속의 자화상’을 보자. 스물한살에 그렸다는 이 그림 속에서 파르미지아니노는 볼록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왜곡되어 비쳐지는 것에 큰 흥미를 느꼈음을 알 수 있다. 거울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자신의 손이 실제보다 길게 보이고, 방안의 모습이 둥글게 비추어지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그는 자신의 미모를 그림 속에서 감추지 않았다. 화가로 성공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자화상을 그리는 젊은 파르미지아니노의 모습은 대단히 아름답다. 남성이 바라보는 거울과 여성이 바라보는 거울이 다른 것인가? 아니면 거울을 바라보며 남성과 여성이 가지는 생각이 다르다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 속에서 여성이 거울을 바라볼 때 그것이 곧 ‘허영’이라는 공식은 비판적으로 다시 고찰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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