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혐오: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익명의 여성들
(4) 여성에 대한 폭력 이미지에 제동을 걸다

애나 멘디에타 ‘무제’, 강간 살해당한 피해자 상태 그대로 연기
여성 피해자 입장·처절한 사실의 관점 견지하면서 사건 묘사
레이시·라보위츠 ‘애도와 분노 속에서’ 희생자 추모 퍼포먼스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언론의 선정적 태도 대중에 알려
美 전역 보도·다수 후원기관 지지…언론 보도 방식 개선 계기 마련

애나 멘디에타 ‘무제’ 1973. 수잔 레이시·레슬리 라보위츠 ‘애도와 분노 속에서’, 1977. 수잔 레이시 ‘강간은’ 1972.(사진 왼쪽부터)
애나 멘디에타 ‘무제’ 1973. 수잔 레이시·레슬리 라보위츠 ‘애도와 분노 속에서’, 1977. 수잔 레이시 ‘강간은’ 1972.(사진 왼쪽부터)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어쩐지 이상하지 않은가? 여성에 대한 폭력, 그러니까 여성에 대한 납치와 성폭행, 그리고 성적 살해의 주제들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그려져 왔던 미술의 역사 말이다. 이러한 주제의 작품들은 관람자의 시선을 쉽게 사로잡고 잊지 못할 이미지로 남는다. 신화나 역사의 이야기라는 배후의 맥락은 강렬한 폭력성을 에로티시즘으로 용인하는 방패가 되었고, 맥락이 사라진 현대에 와서는 전쟁의 참상을 겪은 남성 작가들의 자기 폭로적 고백으로 포장되었다. 이미 걸작으로 칭송되고 있는 이러한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불편함을 토로하는 것은 너무 좁은 견해의 소치인가? 여성이 폭력에 고통을 받는 이야기들은 과거의 신화와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고, 이제는 멀찌감치 물러서서 그 예술성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예술의 한 주제로 ‘승화’된 것을 용인하는 것은 누구의 시각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여성 작가들이 답을 하기 시작했다. 쿠바 이민자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여성 작가 애나 멘디에타(Ana Mendieta)는 아이오와 대학에 다니던 시절, 교내에서 일어났던 강간 살인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 멘디에타는 자신이 재학 중인 대학 내에서 강간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것이 일시적으로 화제가 되었을 뿐 이내 관심에서 사라지는 사건이 되어버리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사건을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작품에 반영하였다. 아이오와 대학에서 여학생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해인 1973년에 제작된 ‘무제(Untitled)’ 연작은 일련의 사진과 영상으로 그녀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것들이다. 애나 멘디에타는 성폭행 후 살해당한 피해자의 상태를 그대로 연기하였다. 하의를 벌거벗고 피칠갑을 한 채 두 발과 손이 꽁꽁 묶여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이 작품은 사진으로 보기에도 매우 충격적이다. 이 퍼포먼스를 위해 멘디에타는 동료 학생들을 자신의 아파트에 초대했고 실제 살해된 피해자인 것처럼 이 상태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열려있던 아파트 문으로 들어온 멘디에타의 동료들은 그녀를 ‘발견’했고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으며, 한 시간 가량 그녀의 살인 피해자 시신 퍼포먼스를 목격하면서 이 사건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멘디에타의 이 퍼포먼스는 성적 살해를 주제로 다루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 자신이 피해자를 연기하며 벌거벗는 수치와 묶이는 공포의 시간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작가의 지인들에게 목격하게 함으로써 세상 어디에선가 늘상 일어나고 있는 그 어떤 성폭행 살인이 아니라 바로 내 곁의 인물이 내 앞에서 끔찍한 일을 당하는 것 같은 체험을 안겨 주었다. 이 작품이 하반신을 벌거벗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어도 달콤한 에로틱한 상상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엄청난 리얼리티 때문이다. 벌거벗은 채 저항하며 몸부림치는 희고 풍만한 여성의 육체를 그린 작품들과 달리, 이 퍼포먼스는 철저하게 여성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처절한 사실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강간 살인 사건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여성작가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미술의 주제로 들여옴에 있어서 방패막이가 되어 주던 신화나 역사 등을 배제하고, 실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이 맞닥뜨린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하고 있다.

수잔 레이시(Suzanne Lacy)는 이미지 재현의 문법에서 벗어나 책의 형태로 ‘강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강간은(Rape is)’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왼쪽 페이지에서 ‘강간은’이라고 글을 시작하여, 일상 속에서 여성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강간은”, “당신의 친구가 강간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신의 남자친구가 이렇게 물을 때이다. 그 친구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는 식으로 말이다.

수잔 레이시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를 미술작품으로 다루는데 있어서 하얀 벽면으로 둘러싸인 화랑이나 미술관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레이시는 다른 여성작가들과 대화를 나누고 협업하고 그것을 공공장소에서 발표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고안하였다. 레이시가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이라고 명명한 이 미술의 형태는 기존의 공공미술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기존의 공공미술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공공장소에 놓이는 미술작품이다. 역사적 사건과 장소를 기리는 기념비이거나 장식적 목적을 수행하거나 간에 ‘커다란 조각 혹은 회화’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인 공공미술이라면, 레이시가 말하는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은 미술이 인간의 실제적인 삶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공공성(publicity)을 가지는 미술인 것이다.

레이시는 1977년에 레슬리 라보위츠(Leslie Labowitz)와 더불어 ‘애도와 분노 속에서’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이 작품의 발단은 당시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했던 여성 연쇄강간살인사건이었다. 피해자들은 모두 목이 졸려 살해된 채로 길에서 발견되었다. 무려 열 명의 여성들이 끔찍한 연쇄살인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이 사건들을 다루면서 피해자의 자세나 의상을 자세히 묘사하는 등의 선정적인 보도 행태를 보였고, 이러한 기사들은 여성들에게 대책 없는 공포심을 조장할 뿐 이 사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개선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시와 라보위츠는 이러한 언론의 현실을 대중에게 알리고 무참하게 살해당한 여성들을 추모하기 위한 퍼포먼스를 공공행사로 기획했던 것이다.

검은 영구차에서 내리기 시작한 여성들은 얼굴을 비롯한 몸 전체를 가린 검은 색 의상을 입고 있었고, 붉은 숄을 걸치고 있었다. 검은 의상의 머리 부분이 높게 만들어져 퍼포먼스에 참가한 여성들은 2미터가 훌쩍 넘는 거대한 모습으로 변모하였으며, 이름 없이 사라진 영혼들의 현현인 것처럼 무시무시해 보였다. 이들의 앞에서 마이크를 손에 든 레이시와 라보위츠는 여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임을 역설하였고, 이 퍼포먼스는 “우리 자매들을 기억하고, 맞서 싸워나가자!(In memory of our sisters, we fight back!)”라는 구호로 마무리되었다. 이 퍼포먼스는 실제로 미국 전역에 보도되었고, 여러 후원기관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후 언론의 보도 방식의 개선에 영향을 미쳤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루는 여성미술가들은 여성으로 살아왔던 삶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이들의 작품은, 과거의 작품들 속에서 납치와 성폭행이라는 주제가 모종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여성의 납치와 성폭행과 살해라는 주제에는 어떤 에로틱함도 개입되지 않고,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승화’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작품은 묻고 있다. 과거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주제 해석의 태도가 이상하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그것은 누구의 시각에서 만들어져 누구의 눈에 의해 감상되도록 고안된 것인가, 여성에 대한 폭행의 장면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은 정당한 재현의 방식인가, 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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