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송만중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송만중은 스무 척이 넘는 경강선단을 앞세우고 북진나루에 닻을 내렸다. 그러나 송만중은 좀처럼 뭍에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배들도 여러 날이 지나도록 강심에 닻을 내린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강장근과 송만중의 움직임이 있어야 그에 맞서 대응책을 세울 텐데 미동도 하지 않으니 북진여각의 최풍원으로서도 조바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진은 그야말로 강장근 일행의 세상이었다. 북진여각으로서는 최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지난번 강장근 선단 때는 우리 동태를 살피느라 뜸을 들였다 해도, 난장이 거의 폐장이 된 마당에 송만중이 끌고 온 이번 경강 선단은 뭣 때문에 배를 띄워놓고만 있었단 말이냐? 곧바로 들어와 내게 원하는 것을 요구해야 하는 게 순서 아니더냐?”

최풍원 말이 옳았다. 강장근 선단은 북진여각에서 가지고 있는 곡물과 장마당에서 거래되고 있는 곡물가 등을 정탐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겠지만, 송만중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북진여각의 내부 사정을 환하게 알고 있었다. 더구나 곡물도 떨어져 장마당에 내놓을 물산도 없는 데다 최풍원마저 쓰러져 거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송만중이가 기다릴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최풍원이가 견디다 못해 스스로 만세를 부르고 북진여각을 내놓을 때까지 기다리려는 속셈인가. 하지만 송만중은 그렇게 인정 있는 씨종이 아니었다. 이득을 위해서라면 숨이 넘어가고 있는 사람도 달려들어 목줄을 물어뜯을 놈이었다.

“화수야, 물개를 시켜 송만중이가 끌고 온 배에 뭐가 실렸는지 알아내라 하거라!”

별채의 밀실에 은거하고 있던 최풍원이 봉화수를 은밀하게 불렀다.

“배에 뭐가 실렸답니까?”

“알 수 없다. 놈들이 눈치 채면 안 되니 각별히 조심해서 하도록 하거라.”

“물개야, 넌 오늘 밤 강 복판에 정박해 있는 경강선들을 샅샅이 뒤져 배에 뭐가 실려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서 가지고 오너라.”

“성님, 염려 마시오!”

“잘못해서 발각되면 만사가 도루아미타불이니 단단히 하거라!”

“물 속에서 절 잡을 놈이 누가 있겠습니까. 심려 붙들어 매소!”

물개가 말했다.

“자만하지 말고 매사에 조심해서 매조이 하거라!”

봉화수가 제 재주만 믿고 매사를 가볍게 생각하는 물개를 경계시켰다.

때는 음력 그믐이라 달빛 한 점 없었다. 멀리 나루터 언저리로 주막집 현등만 보일 뿐 사방은 빛 한 점 없이 캄캄했다. 강심에 정박해 있는 경강선단의 배는 어둠 속에 묻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흐르는 강물소리와 뱃전에 부딪치는 물소리를 구분해 어둠 속 어디쯤 배가 있음을 감지할 뿐이었다. 물개는 동몽회 회원 중에서 물질깨나 한다는 서너 놈을 데리고 헤엄을 쳐서 강심으로 나아갔다.

“야, 잠자는 물고기도 모르게 소리 없이 헤엄을 쳐야지. 배에 있는 놈들 다 깨겠다.”

물개가 헤엄을 치며 따라오는 동료들에게 물탕 소리를 줄이도록 속삭였다. 물개와 일행들은 정박해 있는 배의 구역을 나눠 각자가 맡은 배의 닻줄을 타고 올라갔다. 예상했던 대로 배마다 곡물들이 그득그득하게 실려 있었다. 그런데 선단의 배들 중에서 반은 곡물들이 잔뜩 실려 있었지만 나머지 배는 빈 배였다. 그리고 배를 지키는 놈들도 보이지 않았다. 나루터도 아니고 강의 한가운데 정박해 있고 칠흑 같은 그믐밤이라 안심하고 잠들어 있는지도 몰랐다. 물개는 곡물 섬마다 주둥이를 벌려 속에 들어있는 것들을 가지고 간 주머니에 넣었다. 북진여각으로 돌아온 물개 일행들이 각자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풀어놓았다. 그 안에서 쏟아지는 곡물들을 보며 최풍원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곡물이 아니었다. 곡물이 아닌 것이 아니라 곡물이라 할 수가 없었다. 주머니 안에는 왕겨와 모래, 톱밥과 검불 등 온갖 이물질들이 섞여 있었다.

“투식을 한 곡물입니다.”

“관아에 물량을 채우는 세곡도 아니고 저런 쓰레기나 다름없는 곡물을 뭣 때문에 여기까지 싣고 왔을까?”

“세곡에 투식을 한 것은 봤지만…….”

경강선에 실려 있던 곡물섬에서 몰래 빼온 곡물이었지만, 그것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곡물이 아니었다. 짐승도 골라먹어야 할 정도의 쓰레기나 진배없었다. 수효를 채우기 위해 투식을 한 세곡도 저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저 정도로 투석을 했다면 쌀 한 섬으로 열 섬을 만드는 것도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거저 준다고 해도 골라 먹기가 더 힘들 지경이었다. 한 마디로 버려야 할 것들이었다. 저런 것을 북진까지 거친 물길을 헤치고 올라온 까닭이 궁금했다. 최풍원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모를 일이었다.

며칠 후, 북진여각으로 강장근이가 최풍원을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약조를 한 나루터 주막으로 봉화수가 나가자 거기에는 송만중이가 합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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