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여각의 상권 내에는 서창·단양·연풍에 지소가 있었다. 종이를 만드는 재료는 고정지를 만드는 볏짚과 상지를 만드는 뽕과 유엽지를 만드는 버드나무순, 그리고 한지를 만드는 닥나무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닥나무 껍질인 ‘핏닥’의 겉을 벗겨낸 ‘백닥’으로 만든 한지를 최고의 종이로 쳤다. 특히 서창의 음지마을에서 황봉갑 노인이 만드는 한지는 한양은 물론 중국에까지도 소문이 났다. 황 노인은 여든을 훌쩍 넘긴 고령인데도 종이에 대한 애착은 젊은이 못지않았다. 종이질은 물론이고 기술 또한 뛰어나서 황 노인이 만드는 한지의 종류만 쉰 종류가 넘었다.

객주들이 좋은 종이를 선점하려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종이를 통해 양반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양반님 네들은 항상 종이를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좋은 종이에 대한 욕구가 대단했다. 객주들은 그 욕구를 채워주고 그 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송만중이 서창 지소에 눈독을 들이는 것도 힘 있는 양반과 연결 고리를 만들기 위함이 분명했다. 종이는 팔도 곳곳에서 만들어져 그 종류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수량 또한 이미 쓰고도 남을 정도의 충분한 양이 생산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월악산 기슭의 서창 인근은 토질과 기후가 닥나무 재배에 최적지였고 여기에서 재배되는 닥나무로 만들어진 한지는 조선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종이 중 상품인 상상질이었다.

“화수야, 네가 서창엘 좀 다녀 오거라!”

최풍원이 봉화수에게 직접 서창을 다녀오라고 한 것도 최풍원 역시 송만중과 같은 의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아무에게나 맡겨 설렁설렁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 종이를 만드는 지장 황봉갑 노인을 만나 송만중이의 객주집으로 종이가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를 해야 했다. 또한 양반님 네들과의 관계개선뿐만 아니라 종이 또한 북진여각의 중요한 특산품이었다. 그러니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풍원은 연달아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일어나는 문제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일은 하나도 없이 자고 일어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문제만 계속해서 생겨났다. 그렇다고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수하들이 눈으로 보고 물어 나르는 정보와 발로 뛰는 일은 모두 했지만 행수로서 책임지고 결정해야 할 문제는 누구도 도와줄 수 없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그래서 더욱 힘이 들었다

최풍원은 지금 북진난장을 중심으로 연달아 터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황강 송만중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강장근 선단과도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강장근과 송만중이 청풍부사 이현로를 만나고, 그 수하들이 서창까지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황강 패거리들이 직접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송만중의 화살은 자신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대행수 어른, 저 놈들 꿍꿍이가 뭔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미끼를 던져 보시지요?”

최풍원의 고심을 알고 봉화수가 말했다.

“미끼를 던지다니?”

“국밥 장사를 하려면 냄새를 풍겨야 손님이 오지 않겠습니까?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피고 걸진 국물을 설설 끓이며 구수한 국밥 냄새를 풍기면 사람들이 시장기가 돌아 모일게 아니겠습니까요? 맛도 중요하지만 손님이 찾아오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정도로 충동질을 시켜야지요.”

“그게 저 놈들하고 무슨 관계란 말이더냐?”

“저 놈들도 지금 우리를 관망하며 요리조리 머리를 재느라 죽을 지경이 아니겠습니까? 저 놈들을 편하게 만들어 안심을 시켜놓아야지요.”

“어떻게?”

“저 놈들이 안심을 하게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이구나!”

봉화수의 제안에 최풍원도 동의를 했다.

난장과 나루터를 비롯한 북진 일대에는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다. 최풍원이 경강상인들과 주도권 싸움을 벌이다 쓰러졌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은 발 달린 말보다도 빨라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동시에 몸집도 불어나 다시는 일어나기 힘들게 됐다며 소문은 며칠 만에 최풍원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소문이 퍼지자 강장근 선단에서 갑자기 곡물 공급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값을 다시 배나 올렸다. 그래도 북진여각이나 난장에서는 죽은 것처럼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강장근 선단은 다른 물건들도 값을 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물건 값이 치솟자 장꾼들이 아우성을 쳤지만 강장근을 비롯한 경강상인들은 아랑곳하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격만 더욱 올릴 뿐이었다. 이미 견제를 하던 상대가 없어졌다고 생각한 강장근 선단은 마음대로 물가를 주물렀다. 장사꾼들도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물건 값이 미친년 널뛰듯 했다. 북진난장은 이제 강장근을 비롯한 경강상인들의 독무대가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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