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디제라티 연구소장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며 과거와 공존하면서 변화 발전한다. 그러므로 문화재 활용은 역사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 하며, 문화재가 지닌 가치를 외면한 채 현대적 활용에만 몰두하는 것은 훼손에 가깝다.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자인 한글 창제를 마지막으로 다듬었던 초정행궁이 2017년 12월 첫 삽을 뜬지 2년 만에 완성됐다. 세종이 초정행궁에 머물렀던 행궁은 당대에 소실된 이후 복원이 되지 못했다. 행궁에 관련된 사료가 부족하고 행궁터 또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전통 행궁의 복원이 아닌 테마파크로 활용할 수 있도록 재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쳤다고는 하지만 성급하게 조성한 것이 아닌지 자못 염려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 때문에 잘한 업적까지도 매도되어서는 곤란하다. 올바른 평가가 있어야 하고 행궁이 없는 것은 서글픈 일이어서 재현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두 차례에 걸쳐 초정행차를 하면서 비교적 서늘한 시기를 택하였고, 옛날부터 왕가에서 좋은 일에는 하루에 50리를 가고 군사의 출정에는 하루에 30리를 간다는 전례에 따라 1일 50리 정도로 이동거리에 적정선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을 비롯한 왕비와 왕자는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일부 호위 장군들만 말을 탔을 뿐 수행하는 신하나 군졸들은 걸어서 그 뒤를 따랐을 것으로 보여져 그 고초가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종임금은 어가를 따르는 수행원들이 힘들어 할까 자주 쉬는 한편, 백성들의 민원인 격쟁(擊錚)을 받는 등 여론을 수렴해 국정에 반영했다.

또한 경호상 어가에 접근이 금지 되었음에도 어가행렬을 보려고 모여든 백성들을 제지하지 말라고까지 하면서 가는 지역마다 고을 수령들이 마중하는 것도 자제하였다. 보통 임금의 행궁 행차에는 그 행차 목적에 따라 수행원의 수가 정해진다. 초정행궁에서 무려 4개월간 머무는 것은 정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만큼 임시조정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세종은 한글 창제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완성시키기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과 최소한의 조정 신하들만 수행하게 한 중규모의 어가 행차였다. 이처럼 한글 창제는 나라 안팎의 견제와 반대 속에서 끈질기게 추진된 집요한 정치적 기획이었기 때문에 왕실 경호대는 최소로 하고 지역부대 군인들이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훌륭한 임금은 한 몸의 편안함을 위해서 많은 사람의 고생스러움을 잊지는 않는다. 행궁이 머무는 기간 동안 제반 준비와 의전을 위해 초비상 사태인 초정일대는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자 그 손실을 충분히 보상해줬다, 그럼에도 보상에 불만을 가진 이들에 의해 세종이 머물렀던 행궁이 소실되는 불행을 맞게 된다. 세종의 덕으로 볼 때 충분한 보상이 됐는데 필자가 추정하건데 혹여 지방 관리들의 농간에 농민들의 분노가 터진 듯하다. 이를 잘 파악한 세종은 방화범을 극형에 처하지 않고 죄를 묻지 않은 성군이셨다.

전통은 시대에 따라 발전해야 하듯이 옛 행궁을 재현해 경제성 있는 테마파크로 운영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러나 초정약수의 그간 무분별한 개발에 신종플루를 앓고 있어 날이 갈수록 수질 저하와 부족에 대비한 보존정책 개발에 중점을 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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