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그러니 어찌 하겠느냐? 실은 송만중이와 함께 온 경상이 서찰을 하나 들고 왔는데 김판규 대감의 서찰이었다.”

김판규 대감이라면 이 나라에서는 임금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대단한 세도가였다. 그런 위세를 내륙 깊숙한 시골 고을의 종삼품 부사가 무슨 수로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미향이를 봐서는 남자다운 기개로 하늘에 별이라도 따다 주고 싶지만 별은 꿈이고 목줄은 현실이었다.

“그 경상은 어떤 자이옵니까?”

“그자의 말로는 김 대감 댁 가용에 쓰이는 물건은 모두 그가 대준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그런 위세 높은 대감의 서찰을 지니고 온 것이 아니겠는냐?”

“혹여 가짜 서찰은 아닐런지요?”

“그럴 리가 없다. 발각되면 목이 열 개라도 모자를 일인데.”

“그래, 그 서찰에는 뭐라 쓰여 있던가요?”

“자기 수족과 같은 사람이니 부사가 알아 도와주라는 부탁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 부탁일 뿐 강압이나 마찬가지였다.

“영감, 송만중이 황강 난장 얘기만 하고 그냥 갔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 자가 난장이 어려우면 우선 나루터에서 짐 부리는 일과 난장에서 장세 징수권을 자기에게 주면 안 되겠는가 묻더구나. 그래서 그런 일들은 아전과 상의해 보라고 했구나.”

이현로는 그 일이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요즘 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발단은 거기에 있었다. 송만중은 처음부터 황강 난장이 목적이 아니었다. 송만중은 어떻게든 북진난장에 파고들어 훼방을 놓고 북진여각의 최풍원에게 타격을 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최풍원의 북진여각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송만중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청풍부사에게 접근한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었다.

“영감, 그 자가 다시 찾아와 무슨 청탁을 하더라도 들어주시면 아니 되옵니다!”

미향이가 이현로에게 매달리며 다짐을 받으려 했다.

“어허 그것참, 김 대감이 경상의 모든 편의를 봐주라고 간곡한 당부를 했는데…….”

이현로는 김판규 대감의 서찰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호피까지 바치며 찾아왔을 때는 무언가 단단히 꿍꿍이가 있는 자들이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무엇이든 허락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위험한 자들이옵니다. 다른 방도를 찾아볼 터이니 영감은 모르는 척 해주세요.”

“김 대감의 눈 밖에 나지 않으면서 그들의 부탁도 거절할 무슨 방도라도 있느냐?”

“영감께서는 겉으로는 도와주는 체 하며 차일피일 시간을 끌어주세요.”

미향이가 이현로를 호피 위에 쓰러뜨리며 올라가 요분질을 쳤다. 이현로 역시 미향이의 몸놀림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살맛을 잊지 못해 부르르 떨며 미향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학현취적에서 원적을 마치고 미향은 곧바로 북진여각으로 최풍원을 찾아갔다.

“부사나 아전 놈들이나 관 물을 먹는 놈들이 더 지저분하고 추접스러워! 우리네 장사꾼들보고 약삭빠르다고 하면서 받아 처먹을 것은 다 받아 처먹고, 뒤로는 딴 짓거리하는 하는 놈들이 양반이여!”

미향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최풍원이 겉으로만 고고한 척하는 벼슬아치들의 꼬락서니가 못마땅해 담뱃대로 재떨이를 탁탁 쳤다. 불과 달포 전에 난장이 열리기 직전, 버드나무집에서 이현로 부사와 청풍관아 아전들이 최풍원에 난장 전매권을 주기로 약조를 했던 터였다. 그럼에도 세도가 김판규 대감을 핑계로 전매권에 흠집을 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일개 장사꾼인 최풍원이 부사인 이현로에게 따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서방님, 우선 부사에게 약채를 독하게 쳐 손발을 묶어놓은 다음 송만중이 손을 보시지요?”

그것은 미향이 말이 옳았다. 난장이 한창 성시를 이루고 있는 판에 송만중이 끼어들어 장마당을 후정거리면 자칫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하루라도 미룰 일이 아니었다. 그 길로 최풍원은 부사 이현로를 만나기 위해 강을 건너 청풍관아로 들어갔다.

“부사 영감, 이 자기를 받아주시지요.”

“이게 뭔가?”

“이 고장 특산품이옵니다. 단양 상선암 위 방곡에 자기를 굽는 명인이 있습니다. 영감님 영전하시어 대궐로 들어가시라고 도공에게 특별히 청을 넣어 궐어를 넣어 구운 자기이옵니다.”

최풍원이 쏘가리가 그려진 도자기를 부사 이현로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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