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연 칼럼]열반의 고향을 위하여
[김병연 칼럼]열반의 고향을 위하여
  • 충청매일
  • 승인 2019.11.2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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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청주예총 부회장

[충청매일]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 때문에 나는 죄를 저지른다. 언젠가는 이들,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과 헤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왔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미워하던 사람도 사라질 것이며, 사랑하던 사람은 가고 오질 않을 것이다. 마치 꿈결과 같이 모두가 사라져만 갔다. 다만 그들 때문에 지은 죄악만이 내 앞에 남아 있다.

온산을 붉게 물들인 단풍이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떠나는 낙엽을 보노라면, 돌아올 기약도 없이 저세상으로 떠난 가족들이 생각이 난다.

“형님, 내일 저는 중국으로 출국해요, 그 동안 건강하셔요!”라며, 택시비로 5만원 지폐 한 장을 드렸더니, “동생 고마워! 지난번에 준 돈이 오천원인 줄 알았는데, 내릴 때 보니 오만원이더군! 오늘도 고마워 잘 다녀와!” 이것이 2년전 9월 초, 집안조카의 결혼식에 참가하고 큰 형과 헤어지면서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이야! 금년 시월에는 작은 형마저 뜻밖에 떠나고 나니 서글픈 마음을 이루 형언 할 수가 없다.

명심보감에 ‘형제는 수족(手足)이요, 부부는 의복(衣服)이라!’고 했다. 아들 여섯에 딸 하나! 7남매의 셋째로 태어난 나는 마흔이 될 때까지는 ‘죽음’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 같았다. 그러던 중 둘째 동생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을 때는 수족이 절단되는 아픔을 통감했다. 10년 전에는 막내 여동생이 떠나더니, 최근 2년 사이에는 위로 두 형을 모두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저께는 서울의 한 사찰에서 둘째형의 49재에는 애통함에 눈물을 적시었다.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을 3가지-‘절대성’(누구나 꼭 죽는다), ‘불시(不時)성’(언제 죽을지 모른다.) ‘불가지(不可知)성’(죽음 후의 세계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로 정의하였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우리들의 숙명이다. 부처님께서는 생사를 초월하는 ‘열반’을 지상의 목표로 삼아서, 깨달음을 통하여 생사를 극복하도록 가르쳤다.

금강경에 따르면 무위법(無爲法)과 유위법(有爲法)이 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나고 죽는 유위법이다. 우리가 살면서 생사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것도, 모두가 ‘재(財:돈), 권(權:권세), 명(名:명예), 애(愛:사랑)’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애착하고 탐내는 것들도 결국은 모두가 허상에 불과하다. 사람이나 물질이나 구하면 언젠가는 사라지게 마련이다.

이에 반하여 ‘무위법’은 모든 고통이 사라진 열반의 세계다. 열반은 우리의 본래 고향이다.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본래 고향을 등지고 허망한 꿈속을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고향인 진여의 세계로 돌아나는 것이다.

열반의 고향을 위하여, 일체의 유위법을 ‘몽(夢:꿈), 환(幻:꼭두각시) 포(泡:물거품), 영(影:그림자), 로(露:이술), 전(電:번개)’과 같이 보라고 한다. 이것을 육관(六觀) 수행이라고 한다. 먼저 떠난 가족들에게! 허망한 세계에서, 허망한 것을 위하여, 허망하게 헤매고 있는 꿈에서 깨어나, 영원한 안식처인 ‘열반의 고향’으로 귀의하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그래서 죽음을 또 다른 시작이라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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