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그해 아버지의 여름은 유별나게 뜨거웠다. 정년퇴직을 하시는 선생님의 행사를 주관하여 치르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행사장 관리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늦은 시간까지 일을 처리하려다가 과로로 쓰러지신 것이다. 대전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어 검사한 결과 뇌경색 진단이 나왔다. 곧바로 혈전용해제를 투여하고 긴급 조치를 취했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고 혼수상태였다.

긴장 속 날들이 며칠 흐르고 아버지의 의식은 조금씩 돌아왔다. 그러나 몸은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때부터 나의 이중생활은 시작되었다.

아침에 병원에서 직장으로 출근하고 퇴근하면 병원으로 달려가 간호했다. 저녁 식사는 컵라면으로 대충 때우고 밤을 거의 지새워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는 호전되어 한쪽 팔과 다리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늦은 가을날이 싸늘해졌다. 일기예보에서 내일 아침 서리가 내린다고 한다. 아직 호박잎이 새파랗고 나뭇잎이 곱게 물들어 있어 가을을 즐기기 딱 좋은 시기인데 서리가 내린다하여 아쉬운 마음으로 밖을 조금 더 감상하려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깜짝 놀라 일어나보니 언제 잠들었는지 아침이 밝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밖을 내다보니 언덕에 파랗게 뻗어있던 호박잎이 새까맣게 변했고 축 처져있다. 서리가 내린 것이다. 잠시 후 아침 햇살이 나뭇가지에 내려서자 예뻤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인생이고 식물이고 하루아침이다. 허무하다. 아직은 조금 더 살아있어도 되는데 빠른 감이 들지만 자연 앞에선 당할 자가 없다.

봄부터 공들이고 가을에 겨우 분장했는데 서리 한방에 날아간다. 산과 들을 화사하게 물들였던 단풍이지만 아름다움을 뽐내보지도 못하고 이슬처럼 사라진다. 평생을 노력하여 화려하게 살아왔던 인생도 서리 한방에 덧없이 날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뇌졸증, 뇌경색으로 쓰러지면 서리 맞았다고 얘기한다.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 늦출 수는 있었을 텐데. 아쉬움을 남긴다.

길가에 심은 감나무 가로수의 예쁜 단풍잎이 떨어져 도로에 둥글게 그림을 남긴다. 생을 다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마감한다. 그것이 그들의 의무요 사명인 것이다. 그런 나무는 잎이 떨어져도 이듬해 다시 새싹을 틔운다. 식물도 서리 맞고 죽어도 다음 해에 씨앗을 싹트게 하여 다시 부활한다. 또 다른 생을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

결국 아버지께서는 뜨거운 여름을 몇 번 넘기지 못하고 은하철도를 타고 은하수 너머 우주여행을 떠나셨다. 나무가 아름다운 단풍잎을 남기고 마감했듯,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고귀한 업적을 남기고 우주 여행길을 떠나셨다.

인생의 여유로움을 즐겨야 할 황혼기에 서리를 맞고 길을 잃어버린다. 고통 속에 겨우 연명하다 가족과 친지에게 상처만을 남기고 길이 아닌 길로 떠난다. 반겨주는 이는 없겠지만 고통 없는 세상으로 홀연히 사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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