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째 ‘웅크린 말들’(이문영 저, 후마니타스 / 2017)을 읽고 있다. 어떤 매체에서도 접하지 못했던, 어떤 책에서도 읽지 못했던 말들을 읽으며 우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읽을수록 우울해지는 책. 때론 끓어오르는 분노에 심장이 떨리고 끝내 눈물이 흐르는 책.

나는 1974년 시절 좋은 5월 어느 봄날에 태어났다.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녔고 라면도 실컷 먹었고 컬러TV로 88서울올림픽을 봤다. 내가 자란 작은 시골은 먹고 살기 위해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가난한 농촌이었지만, 전쟁도 없었고 독재도 없었고 노동 탄압도 언론 탄압도 없었다. 그래서 최루탄 구경도 못 했고 삼청교육대에 간 사람도 없었고 강제 노동을 당하지도 않았으며 빨갱이도 없었다. 초가집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집집이 전화기가 놓이고 경운기가 들어왔다. 그때마다 고맙게도 농협은 대출을 권장했다. 

알 수 없는 것과 알지 못한 것은 다르지 않다. 내가 알지 못했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1970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분신했다. 사람의 노동이, 노동자의 인권이 차 한 잔 값보다 못했던 현장의 울부짖음을 국가는 해프닝으로 여겼다.

이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가난한 우리 아버지, 누이들은 꽃다운 청춘을 국가재건을 위해 바쳤다. 내가 알지 못한 세상에서 가난은 죄였다.

정선이 카지노 세상으로 바뀌고 구로공단이 디지털단지로 바뀌어도 노동자의 삶은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일 뿐이었다. 노조 결성은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불법 행위로 탄압을 받아야 했고 사람 위에 있는 법은 징역을 선고했고 죽음은 늘 외로웠다. 

2019년 최저임금 8천590원, 해마다 최저임금 인상을 두고 말들이 많다.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나라 경제가 망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윤의 극대화를 바라지 않는 기업이 없겠지만, 이윤을 노동 착취로 해결하려는 사고부터 바뀌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 외국인노동자가 수백만 명이 넘는다. 우리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값싼 노동력이 외국인으로 대체되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싸늘한 시체로 바다에 버려졌다.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한 사람의 목숨은 하찮은 것인가. 우리도 독일로, 베트남으로, 사우디로 외화벌이를 떠났던 시절이 있었다. 배고파 생오이를 먹으며 견뎌야 하는 어여쁜 이국의 아가씨들에게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 가난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우리의 청춘들은 편의점에서 패스트푸드점에서 유통기한 지난 삶을 버티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내일이 아니라고 외면한다. 또 어떤 이는 과거 속에 묻혀 산다. 또 누구는 끊임없이 싸우고 있으며, 또 누군가는 끊임없이 지키려 애쓴다. 나는 어떤가. ‘웅크린 말들’을 읽으며 나는 왜 분노하고 눈물을 흘리고 우울해지는가. 너무 오래 웅크리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승만(1948~1960)-윤보선(1960~1962)-박정희(1963~1979)-최규하(1979~1980)-전두환(1980~1988)-노태우(1988~1993)-김영삼(1933~1998)-김대중(1998~2003)-노무현(2003~2008)-이명박(2008~2013)-박근혜(2013~2017)-문재인(2017~). 지금 당신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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