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각 지역의 무과 지망생인 한량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조직된 사계는, 갑오경장의 여파로 제 기능을 잃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계는 대부분 그 지역의 유지나 관원 또는 관리 출신들의 친목단체입니다. 이 친목으로 돈을 모아서 한량들을 지원하는 방식인 것이죠. 그런데 돈을 쓸 일이 없어지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말로 단순한 친목 모임으로 돌아섭니다. 그래도 사계라는 말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쓰입니다.

남원의 관덕정은 몇 백 년의 역사를 지닌 활터입니다. 이 활터 건물은 활터의 소유가 아니라 기로회 소유입니다.

기로회는 원로 벼슬아치 출신들의 모임입니다. 옛날에는 그 지역의 원로들 모임이었을 것이고, 이들이 지역의 한량들을 육성하기 위하여 활터를 만든 것이 관덕정이었던 것입니다.

영광 육일정의 사계도 발견되었습니다. 육일정에 부부동반으로 활 쏘러 간 이건호(디지털 국궁신문 운영자) 접장이 우연히 발견하여 소개한 글입니다. 병풍처럼 접는 첩(帖)의 형태로 만들어졌고, 친목회의 여러 규약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조직입니다.

그 사계첩은 활터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영광의 한 노인회에서 갖고 있습니다. 이름만 사계이지 실제 내용은 친목회 규약입니다.(‘국궁논문집3’)

강경 덕유정의 사계도 유명합니다. 덕유정의 경우는 덕유정에서 소장 중이고, 실제로 덕유정에서 사계를 주관해왔습니다. 덕유정 사백을 지낸 한영국 접장의 소개로 온깍지궁사회에서 처음 답사하여 국궁계에 소개했습니다.(‘국궁논문집2’)

특이한 것은 영암 열무정의 경우입니다. 이곳은 사포계라는 것이 있어서 활터의 임원을 선발하여 추인을 받는 구조입니다.

지금은 관습만으로 남아있지만, 옛날에는 활터의 우두머리를 뽑아서 그곳 지역의 후원단체인 사계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 이 역시 국궁문회연구회에서 답사하여 세미나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 있습니다.

결국 옛날에는 활터가 사계의 지휘 하에 있던 것이었음이 분명해집니다. 서울 지역을 보면 더욱 또렷합니다. 서울지역은 왕실에서 직접 나서서 이런 단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1899년에 고종 황제의 윤음으로 황학정 사계를 조직하는데, 이때도 사계가 활터의 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0년의 경성관덕회 사계 출범에서도 황학정의 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 황학정의 사계장 엄주익한테 허락을 받는다는 내용이 나와서 이런 형태가 당시의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활쏘기의 나침반’)

지금 우리는 활쏘기에 대해서 말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줄기 하나를 당겼더니 땅 밑에 파묻혔던 수많은 알뿌리들이 줄줄이 딸려 올라왔습니다. 활쏘기는 마치 조선시대로 통하는 혈관과도 같아서 들여다볼수록 조선시대의 몸통까지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살아남은 전통문화의 유일한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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