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그러게 말이오. 어떤 때 돌아다보면 세월을 도둑맞은 것 같다오. 내일은 오늘보다 좀 나아지겠지, 나아지겠지 하며 속아 살다보니 어느새 한평생이 다 지났구려.”

영감이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망치 들 힘 있을 때까지 두드리다 부르면 가면 그뿐이고, 이 세상에 별 아쉬움도 없다우.”

“누군들 애착이 있을까마는 문득 돌아보면 허해서…….”

“영감님은 어디서 오셨수?”

“금수산 정중동서 왔수.”

“꼭두새벽 밥 자시고 출발했겠수?”

“그런데 곰보는 안보이네?”

영감이 대장간 안을 훑어보며 물었다.

“곰보는 난장에서 떨려난 것 같수.”

“아니, 왜?”

“작년 난장에서 값을 호되게 후려서 사람들 말이 많았던가 보우.”

“값이 좀 과하긴 했어도 곰보가 연장 하난 일품으로 벼렸는데…….”

영감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이제부터는 내게 맡겨 보슈!”

“곰보는 쇠를 얼마나 잘 다뤘는지 해를 걸러 두 해에 한 번만 벼려도 됐었는데…….”

“난, 영감이 저승사자만 따라가지 않는다면 세 해가 지나도 무뎌지지 않게 벼려 주겠소이다. 내 마수기도 하고. 마수도 보통 마수요? 북진 와서 대장간 열고 영감이 첫 손님이니 특별히 담금질해서 벼려 드리리다!”

곰보의 재주를 못잊어 하는 영감의 말투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른 대장장이 천 씨가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대장장이 천승세의 장담은 허언이 아니었다. 천 씨는 망치 밥만 예순 해를 넘게 먹어왔다. 대장장이는 불과 쇠를 다루는 기술자이다. 어려서부터 만들기를 좋아하며 손재주가 있었던 천 씨는 장날만 되면 대장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바람 새는 풀무소리를 들으며 해 넘어가는 줄 모르고 구경을 하곤 했다. 그저 덩어리에 불과했던 쇠가 대장장이 손만 닿으면 칼이 되고 호미가 되고 낫이 되고 뭐든지 원하는 대로 만들어졌다. 달궈진 쇠를 두드려 온갖 연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신기해 천 씨가 대장간을 찾아가 풀무를 잡은 것이 열 살 나던 해였다. 그때는 그저 재미있기만 해서 하루 종일 풀무질을 해도 힘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겨드랑이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그렇게 시작한 대장장이 일을 풀무질에서 집게잡이가 되기까지 십 년 동안 밥만 얻어먹으며 기술을 배웠다. 대장간 일은 석 삼 년은 해야 강아지만큼의 눈치가 생긴다고 할 정도로 고되고 어려웠다. 풀무질과 허드렛일 삼년 만에 천 씨 키만한 망치를 잡고, 망치잡이 삼년 만에 드디어 쇠를 만질 수 있는 기술자인 집게잡이가 되었다. 그것은 불과 쇠의 성질에 대한 가늠이 섰다는 선생의 인정이기도 했다. 천 씨는 그때의 감격을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이제는 쇠만 봐도 쇠의 성질에 따라 어떻게 불을 다뤄야 하는지 눈을 감아도 훤하게 떠올랐다.

“영감님, 이 쇠 참 좋소이다.”

천 씨가 한 손으로는 풀무질을 하며 또 다른 손으로는 집게로 잡고 벌겋게 달아오른 연장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말했다.

“괭이는 녹여 호미로 만들어 주시우!”

“이젠 괭이질도 힘에 부치는가 보우다?”

주인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쇠도 용도가 달라졌다. 힘에 부쳐 무거운 연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 늙은이들은 자신이 다룰 수 있는 가벼운 연장으로 바꿨다.

대장장이 천 씨가 벌겋게 익은 쇠를 꺼내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질을 시작했다. 대장간 안에 망치소리가 가득했다. 천 씨는 쇠를 아낙네들 떡 주무르듯 했다. 그의 망치질에 따라 괭이가 호미로 모양새가 차차로 바뀌어져갔다. 천 씨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영감님! 바른손 잽이요, 왼손 잽이요?”

천 씨가 힘에 겨운지 잠시 망치질을 쉬며 물었다.

“왼손잽이요.”

“그럼 왼 호미를 만들어야겠구려.”

망치와 집게를 바꿔 쥐며 천 씨가 말했다. 천 씨가 영감의 연장을 모두 벼리고 나자 한낮이 다 된 시각이었다.

“대장, 고생하셨수다.”

손질이 끝난 연장을 지게에 지고 일어서며 영감이 엽전 몇 닢을 천 씨에게 건넸다. 엽전을 받아 쥔 천 씨가 손바닥에 올려놓고 침을 툇툇툇 뱉았다. 마수걸이였다.

“영감님! 마수를 시켜주었으니 내가 막걸리 한잔 대접해드리리다.”

대장장이 천 씨가 영감과 함께 장터 국밥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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