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충청매일]  지난 6월 말 정북토성을 답사하기로 한 날은 하늘이 시끄러웠다. 바람이 불고 검은 구름이 오락가락한다. 정북토성은 1995년경만 해도 잡목이 토성 위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성안에는 마을이 있었다. 근처를 지나면서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그냥 지나치곤 했었다. 그때 가서 사진을 찍어 두었더라면 오늘 답사와 많은 비교가 되었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토성 입구 공터에 차를 세우니 굵은 빗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지고 바람이 몹시 불었다. 예전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내부를 깨끗이 정비해 놓았고 외부 정비도 이미 시작되었다. 

바람을 맞으며 토성 안으로 들어갔다. 토성 내부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고 안내판만 있었다. 예전에 있던 마을도 깨끗이 철거하고 잔디를 심어 깔끔해 보였다. 통행할 수 있는 길만 정문으로 보이는 동쪽 문에서 서문으로, 남문에서 북문으로 내서 중앙에서 교차하게 했다. 동문에서 걸어서 토성의 한가운데로 가보았다. 중앙에서 다시 남문으로 가보았다. 남문은 서쪽에서 오는 성벽과 동쪽에서 가는 성벽이 서로 엇갈리게 쌓아 통로를 만들었다.

성벽 위로 올라가 보니 높이는 약 4m 정도 너비는 약 2m 정도 되었다. 성벽 위에는 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 나무 그루터기는 대부분 참나무와 소나무였다. 토성의 성벽 위에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던 흔적이다. 소나무 서너 그루만 남아서 성벽의 허허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성벽 위를 천천히 거닐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서쪽으로 미호천이 흐르고 동으로는 정북동이 보였다. 그리고 너른 들판에는 이미 모내기가 끝나서 초록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멀리 남서쪽으로 부모산이 보인다. 부모산성에서도 여기를 보면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동으로는 상당산성, 와우산토성에 접하고 오창 산업단지 뒤쪽에 목령산이 바로 코앞이다.

정북토성이 있는 들판을 팔결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무심천과 합수하여 미호천이 되는 부분을 까치내라 하고 까치내로 흘러가는 물을 팔결물이라고 한다. 팔결물은 증평 보광천이 내수를 거치면서 오창에 이르는 동안 기름진 들판을 적신다. 그리고 옥산을 지나 오송들로 이어진다. 정북토성은 바로 팔결물이 무심천 물과 합수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즉 팔결 들판에서 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부분에 있다. 전에는 성벽 위에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서 경지 정리한 들판 한가운데 마름모꼴로 들어앉은 것처럼 보였다. 마치 곡창지대를 적시는 들판의 요새 같았었다.

정북토성은 이렇게 미호천변 평야지대 평지에 흙으로 쌓아올린 성이다. 조선 영조 20년(1744)에 승려 영후(靈休)가 기록한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았는데, 견훤이 산성을 빼앗아 정북동 토성으로 짐작되는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후삼국 시대인 9세기 후반이나 10세기 초에 조성되었다고 보면 적절할 것 같다. 그런데 발굴조사 과정에서 축성법을 보면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아직도 정확한 학설은 없는 것 같다.

토성은 찌그러진 사각형 모양이다. 둘레 675m이고 문지가 4개소이다. 남문지와 북문지는 좌우 성벽이 어긋나게 만든 것이 특이하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축성법으로 생각된다. 평면은 정확히 남북향은 아니라 하더라도 거의 정남북이며 동서남북 벽의 중간쯤에 통로가 있다. 서북쪽 모서리에는 미호천 제방으로 통하는 소로도 있다. 동문에서 서문으로 통하는 통로가 주된 통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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