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악녀: 남성을 힘들게 하는 나쁜 여자들
(2) 아담의 첫 번째 부인 릴리트
‘릴리트’ 히브리계 이름으로 아름답지만 음탕한 창녀 가르켜
19세기 팜므 파탈 이미지 대유행으로 미술작품 소재로 등장
英 화가 존 콜리어 작품에서 뱀과 한몸이 된 릴리트 그려내
아담 버리고 뱀과 통정하는 것 같은 모습에도 아름다움 주목
로제티 詩 ‘육체의 아름다움’에선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남성의 목을 꺾고 심장을 휘감아 멈추게 하는 여성으로 묘사

존 콜리어 ‘릴리트’ 1887(왼쪽),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레이디 릴리트’ 1868.
존 콜리어 ‘릴리트’ 1887(왼쪽),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레이디 릴리트’ 1868.

[이윤희 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구약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의 부인은 누가 뭐래도 이브이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낙원에서 쫓겨나 세상에 버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부부로 살았다. 하지만 이브 이전에 아담에게 또 다른 부인이 있었다는 유대교 신화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의 이름은 릴리트.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수메르와 바빌로니아 지역의 민담, 전설의 형태로 구전되었고, 기원후 초기 히브리어 문헌에 등장하기도 한다.

릴리트라는 히브리계 이름은 아름답지만 부도덕하여 남자를 유혹하면서 사는 음탕한 창녀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구약성경의 이사야서에도 릴리트의 이름이 나오는데,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숫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는데, 릴리트가 거기 거하며 쉬는 처소로 삼는다”라는 대목이다.

즉 릴리트는 사람이지만 동물들과 더불어 거칠게 살아가는 여성이다. 여러 가지의 설들이 있지만 종합해보자면, 아담의 첫 아내는 이브가 아니라 릴리트였고, 릴리트는 아담에게 순종하지 않고 자신이 성행위를 주도하여 아담과 다투고 난 후 그를 떠난 여자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최초의 인간 여성이자 최초의 이혼녀인 셈이다.

유대 전설에 의하면 릴리트는 이브처럼 아담의 갈빗대를 가지고 만든 여성이 아니라, 아담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다. 아담과 잠자리에서 다투고 그를 시시하게 여겨 떠났을 뿐 아니라, 그녀의 악행은 아담과의 이별 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느님의 비밀을 알아낸 후 심지어 협박을 했고, 천국에서 쫓겨난 뒤에 바다 악어 아시모다이의 짝이 되어 매일 수백 마리의 괴물을 낳아대는 마녀가 되었을 뿐 아니라, 홀로 잠드는 남자들의 침대 속에 기어들어가 몽정하게 만들어 더 많은 악마들을 낳는데 그들의 정액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릴리트는 선악과를 먹은 적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살면서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순진한 남성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욕에 넘치고 남편을 무시하는 여성과 헤어질 수 있었으니 아담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봐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미셸 푸코에 의하면 19세기까지만 해도 성욕이라는 것은 남성에게는 정상적이고 피할 수 없는 욕망이지만, 여성에게 있어서는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 남편은 밤에 별로 괴롭히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정숙한 부인의 사고방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릴리트는 남성들이 조심해야 여성으로 일컬어졌고, 유대교의 경전 카발라에서는 남성들에게 부적을 몸에 지녀야 릴리트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릴리트는 19세기가 될 때까지 미술작품에서 별로 다루어지지 않는 존재였다. 성경에 정식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다, 천하에 난잡하고 악하기로 소문난 여성을 그린다는 것이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 팜므 파탈 이미지의 대유행으로 미술작품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영국의 화가 존 콜리어(John Collier)는 릴리트를 뱀과 한 몸이 된 여성으로 그려내고 있다. 릴리트는 자신의 뺨으로 뱀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부비고 있다. 다리부터 휘감아 올라온 뱀은 번지르르하게 윤기가 흘러 그 비늘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질 것만 같다. 릴리트는 눈을 감은 채 뱀과 머리를 맞대고 한껏 뱀의 감촉을 음미하는 것 같이 보인다. 아담을 버리고 뱀과 통정하는 것 같은 릴리트의 모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아름답다. 우윳빛 살결에 굴곡진 몸,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과 무엇보다 긴 머리를 풀어헤친 모습은 웬만한 세상의 남성을 유혹할 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사탄으로 여겨지는 뱀을 감고 어루만지는 행위로 인해 그녀의 악마성은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초원에서 들짐승들과 지내는 모습이 아닌 일반 가정의 모습 속에서 릴리트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여성을 아름답게 그려내기로 유명한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의 ‘레이디 릴리트’가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 속 여인은 그저 평범한 실내의 환경 속에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고 있다. 어깨를 드러내보이며 거의 흘러내릴 것 같은 모습을 한 로제티의 릴리트는 고혹적이지만 어딘지 차가운 눈매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치장하고 있다. ‘레이디 릴리트’라는 제목이 아니라면 이 여인이 릴리트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장치는 별로 없다.

그러나 로제티는 이 작품과 쌍을 이루는 시를 지어 이 그림을 해설하였다. ‘육체의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을 가진 로제티의 시는 다음과 같다.

아담의 첫 번째 아내 릴리트를 두고 사람들이 말하네.

(아담이 이브를 얻기 전에 사랑했던 마녀)

뱀 이전에 그녀가 먼저 달콤한 혀로 아담을 꾀었다고.

그리고 그녀의 매혹적인 머리카락이 최초의 금발이었다고.

대지가 늙어가는 동안 그녀는 여전히 젊은 모습으로 앉아

자기 자신 속에 침잠해 있다네.

그리고 그녀의 눈부신 머리카락에 끌려들어가

남자들은 심장과 육체, 그리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사로잡힌다네.

 

그녀의 꽃은 장미와 양귀비.

오, 릴리트여, 그가 없는 곳에서,

누구에게 향기를 내뿜고 입맞춤을 하며 달콤한 잠으로 사로잡을 것인가?

아! 청년의 눈이 그대 눈동자 속에서 불타오를 때

그대의 매력은 꼿꼿한 청년의 목을 꺾어버리고

목을 죄는 황금빛 머리카락은 사슬이 되어 그의 심장을 휘감네.”

 

로제티는 자신이 그린 릴리트가 표적이 된 남성을 매혹시켜 그의 목을 꺾고 심장을 휘감아 멈추게 하는 여성이라는 점을 글 속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다. 릴리트의 머리 뒤에 찬란하게 피어 있는 장미는 열정의 상징이고, 화면 오른 쪽 아래 물병에 담겨 있는 커다란 양귀비 꽃은 잠과 죽음을 뜻한다. 또한 화장대 위의 불꺼진 두 개의 양초 역시 죽음과 신의 부재를 암시하며, 분홍색으로 빛나는 하트 모양의 향수병은 그녀가 사로잡아 파괴할 남성의 심장을 연상케 한다. 검은 벽 너머로 녹음이 우거진 풍경을 보여주는 창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거울이다. 이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 바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는 거울에 비친 풍경이며, 릴리트가 눈길을 화면 밖 당신에게도 돌리는 순간 당신은 꼼짝없이 그녀의 성욕에 먹잇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댓가는 죽음이다.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진 로제티의 릴리트는 분명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여성으로 보인다. 하지만 로제티는 시 속에서 그녀의 정체를 분명히 밝혔다. 남성들은 그녀를 조심해야 한다. 쉽게 남자를 떠나고 주체적으로 성을 즐기며 신이 만들어놓은 경계선을 떠나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여자를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성은 바로 오늘날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이 아닌가? 로제티는 그 시대에 이렇게 살아가고자 했던 여성들, 신여성들에 대한 경고를 이 그림 속에 담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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