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희 수필가

[충청매일] 이우는 꽃잎처럼 야윈 봄날이 저문다. 습관대로 핸들에 이끌려 도착한 병원 뒤뜰에는 꽃이 지고 여기저기 흩날리는 꽃잎이 하얀 꽃길을 내고 있다.

어머니가 떠나시는 것을 예감했을까. 어머니가 가시던 날, 매화나무에는 붉은 꽃망울이 눈물방울처럼 매달려있었다. 터질 듯한 꽃망울로 어머니를 배웅하던 매화나무에 연녹색의 잎새가 무성한 것을 보니 생을 이끄는 것은 시간인 것 같다.

믿기 어렵지만, 어머니는 잔정 없고 무뚝뚝하던 아버님이 떠나신 후 몇 년은 사람 사는 것처럼 사셨다. 구질구질하던 젊은 날에 보상이라도 해주듯 시장에 가서 연분홍색 스웨터도 사고 몸뻬가 아닌 정장 바지도 사들였다. 박꽃처럼 하얀 얼굴에 크림을 찍어 바르고 연분홍색 립스틱으로 꽃잎 같은 입술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호사를 누려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머니가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큰아들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부재를 확인한 어머니는 정신을 놓았다. 아버님을 보내면서도 흔들림 없이 꼿꼿하던 어머니가 큰아들을 앞세우고 나서는 생가지를 뚝뚝 부러뜨렸다. 

어머니는 가장 믿고 의지했던 큰아들마저 떠나보내고 나서 탈출구가 필요했던 것 같다.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부쩍 잠이 없어진 어머니는 밤을 낮처럼 불을 밝혀놓고 낮과 밤의 사잇길을 통해 바람같이 지나 가버린 과거를 용케도 들추어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어머니는 엉덩이에서 물감을 찍어 이불에 매화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머니를 덮어주었던 이불은 밤새 어머니가 그린 황매화로 꽃밭이 되었다. 어머니의 꽃밭은 계절에 상관없이 수시로 꽃을 피웠다. 그렇게 피어난 꽃은 순식간에 집안을 향기로 가득 채우기도 했다. 죽을 만큼 힘든 고통도 세월에 섞이면 무디어지듯 하루가 다르게 낯설어지는 어머니의 모습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치매는 영혼이 맑은 사람한테 오는 것 같다. 치매는 번뇌와 욕심을 접고 스스로 꽃에 다다를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황홀한 세상이다. 평생 마음고생 하고 살았으니 남은 생은 마음이 가는 대로 살라고 주는 신의 선물 같다.

어머니는 치매가 꽃처럼 왔다. 박꽃같이 하얀 얼굴이 달뜨듯 붉어졌다. 아버님 그늘에서 큰소리 한 번 못 치고 살던 것이 한이 되었던 어머니는 헤실헤실 웃으며 마음속에 있는 하고 싶은 말을 마구 쏟아냈다. 늘 웃고 손뼉 치고 노래도 곧잘 불렀다. 생의 마지막 구간을 걸으며 고통받는 환자 옆에서 웃음꽃을 피우는 어머니는 병실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폐렴으로 며칠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위독해졌다. 남편과 같이 임종을 지키는데 영원한 부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어머니의 휑한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어머니를 닮은 연분홍빛 눈물이었다. 어머니는 딱 하루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홀연히 떠나셨다. 매일 밤 꽃을 피워내던 어머니가 비로소 꽃이 된 것이다.

쉼 없이 이별에 관해 이야기하는 순한 바람 사이로 언뜻언뜻 더운 기운이 몰려온다.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 어머니가 떠나고 무심하게 내리쬐던 봄볕도 하얗게 소멸해간다. 고개를 들고 병실을 올려다보니 창문 사이로 헤실헤실 어머니가 웃고 계신다. 나는 다시는 못 올 어머니의 저무는 봄날을 내시경을 찍듯 아프게 탁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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