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충청매일]  바로 발아래 현암정에서 올라오는 철계단이 보인다. 이 길도 내가 많이 다닌 길이다. 철계단은 모두 108계단이다. 이 가파른 계단을 오르려면 겨울에도 땀이 난다. 한 번쯤 쉬어야 올라올 수 있는 곳이다. 계단 옆으로는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한 삭도가 있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 너무 편하게 올라오면 공덕이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대청댐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바로 오가리 그 아래 도로가 있었다. 거기부터 현암사까지 올라오려면 꼭지가 돌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니 전국시대에 삼국의 세력 다툼이 심할 때는 이 능선을 지켜 문의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군사들이 거처해야 하는 작은 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마당에서 바라보는 대청호수는 절경이다. 커다란 용이 용틀임을 하듯 구불구불 옥천 쪽으로 이어진다. 아니면 베를 짜서 푸른 물을 들여서 너른 들판에 널어놓은 듯하다. 그 절경 한 가운데 청남대가 있다. 안내판에 보면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원효대사가 구룡산의 산줄기를 보면서 아홉 마리의 용과 같다하여 구룡산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또 용은 물이 있어야 하므로 언젠가는 호수가 생길 것이며 호수가 생기면 산줄기 가운데 왕(王)자 지형이 생겨서 임금이 이곳에 머물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청남대가 생기고 민간인의 접근을 막았던 일이 생각난다. 속설에 의하면 이 천년 고찰인 현암사도 없어질 위기에 있었다고도 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청남대 보안에 방해되니 불태워버리라 했다는데 사실인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다행히 충성스러운 보좌관이 목숨을 걸고 간청하여 살아났다고 한다. 절경은 절경대로 또 수난의 역사가 존재한다. 마치 곧은 나무가 쉽게 베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권력에 의해 사찰이 훼손되면, 바로 그 권력이 파멸을 당하는 일은 역사상에도 수없이 많다.

천년고찰 현암사는 백제 전지왕 때 달솔 해충(解忠)이 창건하고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중건했다고 하는데 성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 정조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8년 불자 김사익의 시주로 재건되었다고 한다. 대청댐이 건설된 이후 경관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아마도 신도가 늘어났을 것이다. 원효대사의 예언처럼 한국불교가 이 절에서 흥왕(興旺)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절집에서 또 동쪽으로 난 오솔길을 걸어 조금만 올라가면 최근에 조성한 석탑을 만난다. 그냥 대충 서서 주변을 바라보아도 명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룡산 정상에서 도도록하게 솟아오른 둔덕 위에 평평한 대지가 오십 평쯤 되어 보인다. 이곳에 탑을 세우고 기도처를 마련하였다. 여기서 청남대가 정면으로 보인다. 청남대가 그냥 있었으면 이 석탑도 세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룡산 현암사를 돌아보며 빼어난 경관 이외에도 수없이 수난을 받아오면서도 견디어낸 사찰의 역사에 숙연해진다. 개인이나 사찰이나 또는 국가나 고통을 자청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가오는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발전의 과정이라 생각하며 담담하게 받아들일 때 그것은 고행이 아니라 수행이라는 씨앗이 되어 보다 크고 달달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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