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주 국학박사 ‘한국의 단군 사묘’ 펴내

[충청매일 김정애 기자] 국내 46곳에 건립된 단군 사묘를 답사한 책이 나왔다.

윤한주 국학박사(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는 2017년 1월부터 2019년 2월까지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단군 사묘를 조사한 ‘한국의 단군 사묘(도서출판 덕주/3만5천원)’를 펴냈다고 밝혔다.

사묘(祀廟)란 영정이나 위패 등을 모신 전각을 말한다. 전국의 지역 단군 사묘에서는 개천절마다 제례를 봉행하고 있지만 전체 개수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윤 박사는 “학계에서 이강오 전북대 교수가 1980년까지 30여 사묘를 조사한 연구가 유일하다. 현장에 가보니 10개 정도는 사라진 상태였다. 안내판이 없거나 내용이 잘못된 경우도 많았다. 관련자를 인터뷰하고 새로운 자료를 통해 내용을 바로 잡았다. 1980년 이후에 설립한 단군 사묘도 모두 조사했다”라고 말했다.

윤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국내 단군 사묘는 총 46곳에 건립됐다. 1909년부터 광복 이전까지 6곳이고 광복 이후부터 1999년까지 31곳이다. 2000년 이후에도 9곳이 더 건립된 것으로 조사됐다. 지역으로 살펴보면 대전·충청도 14곳, 광주·전라도 16곳, 대구·경상도 7곳, 강원도 2곳, 서울 4곳, 경기도 3곳이다.

대전시와 충청도는 서산 와우리 단군전(1913), 충주 묵동마을 숭령전(1947), 논산 개태사 창운각(1947), 증평 단군전(1948), 부여 장정마을 천조궁(1949), 논산 대종교 청동시교당(1960), 서산 옥녀봉 단군전(1964), 대전 서구 단묘(1964), 청원 은적산 단군성전(1968), 괴산 흥천사 단군전(1992), 공주 태상전(1998), 공주 단군성전(2001), 금산 참나도원 대웅전(2006), 영동 선교 국조전(2006) 등이다.

단군 사묘가 전국적으로 세워진 배경은 1905년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 이후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국조 단군인식이 언론을 중심으로 국민들에게 확산됐기 때문이다. 단군기원을 사용했고 단군 영정을 모집했다. 단군에 관한 책들이 연이어 출간됐다. 단군 사묘의 건립 또한 단군운동의 일환이었다.

윤 박사는 우리나라에 단군 사묘가 세워진 계기에 대해 “충북 청주 출신으로 3·1운동 때 청주와 인근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만세시위를 일으키게 한 독립운동가인 김재형(1890~1966)은 일제가 단군을 부정하고 전국 각지에 신사를 차려놓고 참배를 강요하자 단군정신을 알리기 위해 전력을 다한 인물로 광복 후 동지들과 청원군 은적산에 단군전을 건립했다”며 “전국 각지의 단군 사묘가 같은 이유로 건립됐다”고 밝혔다. 

3·1 운동에 참여한 김기석(1897~1978)은 광복 후 사재를 털어 증평에 단군전을 건립했다. 현재 증평군 향토유적 1호로 지정됐다.

충주 묵동마을에 살았던 원용선(1899~1968)은 일제의 눈을 피해 집 안에 국조 단군신위를 모시고 국운의 재기를 빌었다. 광복이 되자 1947년 3월 3일 어래산 중턱에 기단을 쌓고 천제단 표석과 조국통일기원비를 세워 천제를 올렸다.

윤 박사는 “일제는 단군을 구심으로 한민족이 결속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단군은 황당한 전설이라고 왜곡해서 가르쳤다. 단군 유적지를 파괴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것이 결국 민족말살정책이었다.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은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자 단군을 정신적 가치로 삼기위해 단군 사묘를 건립했고 광복 이후까지 확산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박사는 “유서 깊은 사찰이나 향교에 관한 책은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단군 사묘에 관해서는 안내서조차 찾기 힘들다”며 “선조들은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사묘를 건립했다. 우리 고장의 소중한 문화재인 단군 사묘를 찾아 선조의 뜻을 기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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