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또다시 홍만경이 실상을 감추고 허풍을 떨었다. 상대가 나를 속이려할 때는 일단 속아주는 것이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유리했다. 상대가 나를 속이고 있다고 다짜고짜 그것을 물고 늘어져 공격을 하면 거래는 그것으로 파장이었다.

“아무리 장사지만서도 꼭 이해관계만 따져 되겠소? 어려울 때 남 사정을 한 번 봐주면 나중에 그 보답을 받고 그게 인정이고 사람 사는 맛이지, 어째 그렇게 빡빡하게 이해만 따지며 세상을 산단 말이오?”

“난 이득만 생각하는 장사꾼이오. 무슨 말을 해도 확실한 징표 없인 난 못 가오!”

홍만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원님과 급창이 흥정을 해도 에누리가 있는 법이오. 흥정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돌아앉기는…….”

최풍원이 홍만경을 얼렀다.

“장사가 인정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당신도 알잖소?”

“알았소. 홍 선주! 그러니 흥정을 하자는 것 아니오? 당신이 북진으로 올라온다면 배끌이 경비와 뱃꾼들에게 들어가는 잡비는 내가 부담하겠소!”

최풍원이 미끼를 던졌다.

“우리가 배타고 유람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배 끌고 올라가는 경비만 해결되면 뭐하겠소. 북진에 가서 거래하는 물목도 문제고 더 근본적인 것은 이득이 아니겠소?”

“목계야 값진 특산품이 뭐가 있겠소? 곡식 섬 잔뜩 실어봐야 등골만 빠지지 몇 푼이나 되겠소? 특산품이 많아야 재미를 보지 않겠소? 원래 목계는 벌이 넓어 곡물이 넘치는 고을 아니오? 가까이 가흥창에는 경창으로 갈 조세도 가득하고…….”

최풍원이 홍만경의 약점을 찌르며 그의 의중을 슬쩍 떠보았다.

“그래도 산간지대인데다 강 주변이 사토라 잡곡은 많지만 미곡은 귀한 곳이오.”

홍만경도 녹녹치 않았다.

“미곡이 넘쳐나도 혓바닥 꺼끌꺼끌한 백성들이 그걸 사먹겠소? 구린 동전 한 닢이라도 있어야 개뿔이나 뭘 사먹지. 한데 나루에는 대선들이 고기떼마냥 즐비하게 정박해있으니 문제 아니오? 살 사람은 없고 물건은 쏟아지고…… 하면 시세는 불 보듯 뻔한 게 아니겠소? 더구나 조금 있으면 가흥창에서 경창으로 세곡을 실어 나를 경강선들이 하루에도 수십 척씩 올라올텐데 그들이 빈배로 올라오겠소? 뭐라도 한양 물산들을 싣고 오겠지. 그럼 물건 값은 더 떨어질게 아니겠소?”

최풍원이 홍만경을 압박했다.

목계나루에서 한 마장 남짓 강 아래쪽 가금에는 남한강 최대의 조창인 가흥창이 있었다. 가흥창은 나라의 세곡·진휼미·군량 등을 임시로 보관하는 창고로 경상도와 충청좌도의 세곡을 운송하고 있는 남한강 최대의 곡물 집산지였다. 이 창의 관할지는 충주·음성·괴산·청안·보은·단양·영춘·제천·진천·황간·영동·청풍·연풍·청산 지역까지 이르렀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조창에 수집된 세곡은 이듬해 이월에 시작되어 가까운 거리는 사월까지 먼 거리는 오월까지 남한강 수로를 통해 한양의 용산창으로 운송되었다. 만약 이 기간을 지키지 못했을 때에는 책임자가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나라 운영의 근간이 세곡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운이 한창일 때는 강나루가 빼곡하게 채워진 배들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뱃일을 하는 수부만 해도 오백 명이 넘었다. 강변에는 객사와 주막이 즐비하여 연일 흥청거렸고 이때가 되면 목계에는 난장이 틀어지고 그 유명한 별신제를 구경하려고 인근은 물론 수십 마장 밖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올 정도였다. 지금이 그때였다. 가흥창은 한양과 물길이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경창이 있는 용산창에 입고하는 기일은 사월 이십일 안팎이었다. 문제는 강물이 풀리기 시작하는 삼월 초순부터 입고 기일인 사월 중순까지 달포가 조금 넘는 짧은 시간 안에 관선이나 지토선만으로는 그 많은 물산을 감당하지 못하는 데 있었다. 그러자 관아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운송료를 지불하고 지역의 사선이나 경강상인들의 상선을 이용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가흥창에서는 세곡운송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활기를 띄고 있지는 못했다. 그 큰 이유 중 하나가 한꺼번에 물산이 몰린 탓에 가격이 폭락하여 경강상인들이 물산을 아직도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유필주는 진퇴양난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적당한 가격이 형성되면 하루라도 빨리 물산을 처분하고 배를 비워 약조한 세곡을 싣고 내려가야 했지만 워낙에 매기가 없어 값이 바닥을 치고 있는 형편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목계 객방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최풍원이 홍 선주의 이런 약점을 알고 야금야금 구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홍 선주도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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