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충청매일]  변해야 할 것인가, 지켜야 할 것인가. 앞으로 나아갈 것이냐, 주저앉을 것이냐. 하나를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다. 흔히, 나이가 들수록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신빙성 있는 말인지 모르지만, 나이 들어보니 새로움이 유쾌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나의 경우 새로움은 두려움보다는 귀찮음에 가깝다. 간혹 나의 이런 태도는 부끄러움을 동반하기도 하는데, 부끄러움의 대상은 보통 변화를 외치는 거리에 있다.

하나를 선택한 혹자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자신의 뜻이 맞음을 증명하려 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많은 이들이 거리에 섰으며, 우리 사회도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싸우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법이니 아직도 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저마다 원하는 것이 다르고 뜻하는 바도 다르다. 이에 따라 정치적 신념도 달라지고 거리에 서는 목적도 달라진다. 그것이 맹목적이든, 정치적이든, 개인적이든 중요한 것은 거리는 변화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경제와 인권 양 팀의 줄다리기 싸움으로 발전해왔다. 경제 성장에 쏠려 있는 힘과 국민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 쟁취를 위한 수많은 투쟁의 역사다.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사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 자식 교육에 헌신적이었다. 새마을 운동은 기적처럼 경제를 성장시켰고 공교육을 받은 많은 기술자가 산업현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분에 우리 사회는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덕분에 교육열은 식지 않았고 인간의 존엄과 행복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가난이 자랑이 될 수 없지만,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살림이 어려워도 나의 지갑에 돈은 늘어나야 하며, 지갑에 돈을 채우기 위해 권력이 필요하거나 남의 희생을 요구한다. 흘린 돈이라도 주워야 살 수 있는 우리는 침묵하거나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이것을 원하거나 반대로 변해야 한다고 외친다. 늘 변화의 외침은 거리에 있었다.

가진 것이 없는 나는 지킬 것이 없음으로 순수한 거리를 갈망한다. 그러나 변화의 거리도 순수한가에는 의문이 든다. 거리가 직업인 사람들, 거리가 생의 목적인 사람들, 거리가 존재의 의미가 되는 사람들을 순수하게 볼 수만은 없다. 이것이 나의 부끄러움을 정당하게 할 수는 없다. 어쨌든 그들의 순정으로 인해 세상은 변하였고 경제와의 줄다리기 싸움을 이어올 수 있었다.

순수든 순정이든 거리는 변화, 혁명의 거리여야 한다. 그러나 최근 뉴스를 접하노라면 나의 꿈같은 바람은 산산이 부서진다. 변화와 혁명의 상징인 단식과 삭발, 농성과 촛불이 왜곡되어 나타나거나 우스꽝스러운 모방의 행동으로 보인다. 지키려는 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들의 순정은 거리의 역사에 먹칠하고 있다.

거리는 혁명의 거리여야 하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한 거리가 절대 아니다. 그러므로 변화를 막기 위해 거리에 서는 행동은 스스로 청산되어야 할 존재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이다. 또한, 혁명의 거리에 편승하려 하는 자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꿈꾸는 순수한 거리는 어떤 정치와도 어떤 권력과도 어떤 부와도 관련이 없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도 개혁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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