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17세기 화약의 발명과 함께 활은 몰락을 맞습니다. 유럽을 떨게 만들었던 터키의 활도 이때 사라졌습니다. 인도도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활의 장점은 먼 거리 무기라는 것입니다. 추진체인 활이 탄력을 내서 화살을 보내는 원리인데, 이 추진체에 변화가 오면 활은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 대체물이 나타난 것이고, 그것이 화약입니다. 화약은 활이 화살을 보낼 수 있는 거리 이상으로 다양한 비행체(총통화살, 탄환)를 보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화약은 엄청난 폭발음을 냅니다. 적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데는 오히려 활보다 더 낫습니다. 이렇게 하여 활은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습니다. 전 세계에 고루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조선에서 특이한 현상이 한 가지 일어납니다. 조선에서는 조총이 들어오고 화약이 발명된 뒤에도 여전히 활이 무과의 주요 과목으로 남습니다. 무과가 폐지되는 갑오개혁(1894년) 때까지 활은 여전히 조선 군대의 주요 무기였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조총보다 조선 활이 더 멀리 날아갔던 것입니다. 무과의 조총 사거리가 80보였는데, 가장 가벼운 연습용 활인 유엽전의 과녁거리는 120보였습니다. 그러니 조총이 들어온 뒤에도 한국의 활은 무기로서 충분히 기능했던 것입니다. 우리 활이 워낙 우수했기 때문에 일어난 세계사의 한 이변이었습니다.(‘활쏘기의 나침반’)

임진왜란 때의 일입니다. 부산에서 며칠 만에 달려서 서울 초입에 다른 왜군이 한강을 건너려고 합니다. 척후병이 지금의 동작 대교 밑에서 맞은편의 용산 쪽 강 너머를 바라봅니다. 지금 그곳을 가늠해보면 몇 m나 될까요? 대충 눈가늠으로 해도 강 건너까지는 1km는 더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용산 쪽에서 동작나루 쪽으로 화살이 날아든 것입니다. 애기살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왜군 척후병은 꽁지 빠지게 달아나죠. 결국 이 일 때문에 왜군이 한강을 건너는 일이 며칠 지연됩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임진왜란 당시 재상을 지낸 유성룡의 『징비록』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국 활의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기관총까지 나온 1894년까지 활쏘기는 조선의 주요 무기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활쏘기가 지금까지 전국의 활터에 이어져오는 중입니다. 기관총은, 같은 해에 봉기한 갑오동학농민군에게 일본군이 쏘아댔다는 기록을 보고 한 말입니다. 1894의 ‘갑오’는 활에서도 중요한 시기입니다.

갑오개혁 때 활쏘기가 무과의 과목에서 사라집니다.(‘활쏘기의 나침반’) 이것은 무과의 생태계가 변한 대 사건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무과는 시험이기 때문에 시험 준비생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전국에 걸쳐 나타난 현상입니다. 요즘에도 지역에서 고시 합격자가 나오면 마을이나 학교에 현수막이 붙습니다. 그것이 집안과 마을의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무과는 그런 통로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진 것입니다. 한국의 활쏘기는 일대 위기를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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