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누드: 미술작품에는 벗은 여자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4) 오달리스크에 대한 판타지

19세기 그림 속에 등장하는 오달리스크 99%는 누드로 등장
에로틱한 감각 확장 위해 ‘목욕탕’ 가장 적절한 장소로 선택
앵그르 ‘터키탕’, 하렘 여인들 열쇠구멍으로 훔쳐보는 듯한 효과
둥근 프레임에 갇혀 더 들여다 볼 수 없는 답답한 느낌 강조
패러디 작품 슬레이 ‘터키탕’, 남성만 등장…사실적 신체 묘사
여성의 시각서 미술사를 바라볼때 느끼는 위화감 말하는 듯

도미니크 앵그르 ‘터키탕’ 1862(왼쪽).실비아 슬레이 ‘터키탕’ 1973.
도미니크 앵그르 ‘터키탕’ 1862(왼쪽).실비아 슬레이 ‘터키탕’ 1973.

[이윤희 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19세기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그 어떤 방법으로도 볼 수 없었던 이국의 여성 누드도 미술가들의 대상이 되었다. ‘오달리스크(Odalisque)’가 그들이다. 오달리스크는 이슬람권 국가에 있다고 전해지는 하렘(Harem)의 여인들인데, 서구인들은 오달리스크는 술탄(이슬람의 왕)의 궁정 안쪽 하렘에서 술탄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던 여자 노예로 그렸다. 서구의 화가들은 하렘의 여인들을 아름다운 용모로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인물이자 어딘가 동물적인 느낌으로 묘사했다.

하렘은 역사적으로 이슬람권에서 여인들이 모인 공간은 틀림없다. 실제 하렘이라는 말은 남녀 공간의 분리를 제도화했던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들이 남성들과의 대면을 피할 수 있도록 안뜰에 지어졌던 공간을 의미한다. 이슬람권에서 왕궁이 아니라 상류층의 가옥에서도 여성의 거처를 분리하는 곳을 마련해 두었지만, 서구 남성 화가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무제한의 에로틱한 향락을 위한 판타스틱한 공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왕궁의 하렘은 많은 궁녀들이 상주하는 곳이었지만, 철저하게 궁정의 예법이 준수되었으며 장차 술탄을 비롯한 왕가의 가족들을 보살피게 될 임무를 교육하고 왕가에서 일하는 남성들의 배우자가 될 여성들을 교육하는 기능도 수행했다. 교육을 어느 정도 받고 나면 개인의 능력에 따라 공식적인 직급이 주어지는 체계도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무수히 등장하는 오달리스크들은 99% 누드로 등장하며 실내에서건 목욕탕에서건 옷을 벗은 상태로 나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물론 오달리스크라는 존재를 실제로 볼 수 있었던 서구 남성들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도미니크 앵그르(Dominique Ingres)의 ‘터키탕’에는 목욕탕에 수십 명의 여성 누드가 갖가지 포즈로 등장한다. 대부분 백인 여성들처럼 보이지만 이곳이 서양이 아니라 이슬람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몇몇 소품들, 이를테면 머리에 두른 터번, 이국적인 액세서리, 그리고 도자기들이 등장한다.

뒷모습으로 터번을 두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의 형태는 앵그르가 특히 마음에 들었는지, 다른 작품에서도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독자적인 화면으로도 그렸던 바 있다. 오른쪽 앞에 있는 여인은 두 팔을 들어 온 몸을 보여주면서도 지루함을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으며, 그 바로 옆에는 여인들끼리 끌어안고 가슴을 만지는 등의 행위를 하고 있다. 언뜻 보면 이들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이때는 동성애를 내놓고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타국이기 때문에 동성애가 자유로웠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특히 여성의 동성애는 서구 사회에서도 논의의 대상조차 아니었으며 그런 이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서로의 몸을 만지는 장면을 화면의 전면에 배치한 것은 레즈비언의 존재 유무에 대한 관심이기보다는 가상의 남성이 사실 이 장면의 주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대리하는 존재로 다른 여성을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뒤로는 팔짱을 끼고 뒤쪽의 여성이 머리에 향수를 뿌려주는 것을 무심하게 즐기고 있는 여인이 보인다.

앵그르의 이 작품은 원근법을 다소 과장하여 공간의 뒤쪽까지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멀리 보이는 여인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선 채로 두 팔을 들어 마치 무용을 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는 여성이다. 양 다리를 교체시키고 팔을 들어 한 쪽으로 상체를 쏠리게 하고 있는 여인의 손에는 악기와 같은 것이 들려 있다. 그 옆으로는 벌거벗은 여인들이 서로의 기대거나, 작은 과일을 먹거나 잠든 동료에게 나뭇가지로 장난을 치고, 무용을 하는 여인에게 시선을 주고 있다. 물론 이곳이 목욕탕인 만큼 화면의 왼쪽 가장자리에는 다리를 물에 담그고 뒤로 몸을 젖히고 여인도 보인다. 앵그르가 상상하는 하렘에서는 검은 피부빛을 가지고 있는 유색인종의 여인들이 백인 여성들의 노예로 그려져 있다는 점 또한 이채롭다.

19세기 서양화가들이 그린 오달리스크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은 하루 종일 목욕을 하느라 살이 불어 터질 것만 같다. 여성들만 드나들 수 있는 남성들의 금지구역이라는 것에 대한 환상이 반영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들이 늘 옷을 벗고 살았을 리는 만무하건만, 화가들이 집중했던 것은 이들이 술탄, 즉 한 남성의 성노예 예비후보들이라는 점이었고, 에로틱한 감각을 최대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옷을 벗은 목욕탕이 가장 적절한 장소이기에 선택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때 ‘터키탕’이라는 불법 성매매 목욕탕에 붙여진 이름이었던 것은 멀리 19세기 화가들의 판타지가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터키탕’이라는 이름은 터키 대사관의 항의를 받고 사용이 금지된 바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통상 그림이 사각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는데, 앵그르의 ‘터키탕’이 둥근 프레임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강한 의문이 든다. 이것은 혹시 남성이 출입하거나 볼 수 없는 오달리스크의 하렘을 열쇠구멍을 훔쳐보는 듯한 효과를 주는 것은 아닌가? 프레임에 잘려나간 오른쪽 잠든 여인은 손과 얼굴만 보일 뿐 몸이 보이지 않는다. 문을 열어젖히면 왼쪽에 위치한 욕조도 보이고 더 많은 여인들을 볼 수 있겠지만 둥근 프레임에 갇혀,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구멍의 한계 때문에 더 볼 수 없는 답답한 느낌을 강조하는 것 같다.

이 작품은 앵그르의 대표작으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19세기를 대표하는 명작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미술사에서 위대하다는 평가는 받는 작품인 만큼, 20세기 들어 성평등의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 미술사가들과 여성 화가들은, 19세기 오리엔탈리즘의 가면을 쓴 오달리스크 소재의 그림들에 본격적으로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 작품이 실비아 슬레이(Sylvia Sleigh)의 ‘터키탕’이다. 이것은 앵그르의 ‘터키탕’에 대한 본격적인 패러디 작품으로 기존의 작품에 대한 여러 가지 대척점을 일부러 설정하였다. 슬레이의 ‘터키탕’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남성이며, 사실 익명의 남성들이 아니라 실비아 화가의 남성 지인들을 모델로 하였고, 화면의 앞에 길게 누운 대머리 남성은 무려 화가의 남편이다. 화면 오른쪽에 기타를 든 남성은 앵그르 작품 속 악기를 든 뒷모습의 여성에 대응하는 인물이다. 가운데 무릎을 꿇고 정면을 응시하는 남성은 슬레이의 다른 그림 속에도 등장하는 인물인데, 서양인들이 결코 무릎을 꿇고 등장하는 경우가 없이 때문에 대단히 이색적이다. 그 옆에도 지루한 눈을 하고 있는 남성과 의자에 앉거나 서서 자신의 몸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남성들이 보인다. 남성들의 신체는 대단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성기가 노출되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기타를 든 남성이 수영이나 태닝을 즐길 것 같은 예상도 가능하다. 허리선 위쪽이 아래쪽보다 더 짙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국적인 분위기 연출을 위해 벽에는 기하학적 문양의 타피스트리를 배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달리스크로 불리는 여성들이 나신으로 악기를 연주하거나 눕고 앉아 있는 모습은 고전적인 명화로 거부감 없이 감상이 가능했는데, 실비아 슬레이의 그림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당혹스러운 느낌을 준다. 단지 여성을 남성으로 교체하고, 상상의 인물들을 구체적인 인물들로 교체하기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오히려 실비아 슬레이 그림의 목적은 이 어색함을 의도적으로 유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불편한 느낌으로 앵그르의 ‘터키탕’을 바라보도록 말이다. 슬레이의 그림은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과 남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미술사 속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점, 그리고 여성의 시각에서 미술사를 바라볼 때 느끼는 위화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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