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그리고 그것은 분명 신임부사 이현로의 결단이 있어야만 되는 일이었다.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깐깐하게 구는 부사 이현로의 태도에 내심 주눅이 들어있던 최풍원이었다. 그렇잖아도 난장 독점권을 확답 받고 분위기를 봐가며 세곡 운반권도 부탁할 요량이었는 데 생각지도 않은 수월함에 최풍원은 힘이 솟았다. 세곡 운반권은 난장에서 얻는 이득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더구나 대궐로 직접 들어가는 세곡인지라 오히려 최풍원의 입지를 세우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청풍 인근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장사에서 벗어나 한양의 다양한 물산과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늦어도 사월까지는 한양의 용산창까지 모든 세곡을 들여놔야만 할 것이오!”

“여부가 있읍니까요. 이방 어른!”

“만일 기일을 넘기면 엄한 벌을 받게 될 터이니 유념해야 하오, 최 행수.”

“염려 놓으시요. 그리고 본댁에는 해송자 한 가마와 상질의 꿀 한 섬, 콩 다섯 섬, 백미 스무 섬을 첫 배로 올려 보내리다. 그러니 부사 영감, 이번 난장의 모든 독점권을 제게 주시면 어떠실런지요?”

최풍원이 이방의 당부에 답하며, 다시 부사에게 시선을 돌려 이번에 틀 북진난장의 독점권을 부탁했다.

“나하고 흥정을 하자는 겐가?”

갑자기 이현로의 안색이 변하며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게 아니오라…….”

갑자기 돌변한 이현로의 노기 띤 얼굴에 당황한 최풍원이 허둥대며 말꼬리를 흐렸다. 너무 쉽게 일이 풀려나간다고 속단한 것이 화근이었다.

“일개 장사치에 불과한 네놈과 술자리를 같이 하는 것도 나라에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 욕된 일이거늘 이젠 흥정을 하자고 덤벼? 건방진 놈!”

부사 이현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좌중이 일순 숨죽은 듯 조용해졌다.

“죽여 주시이다!”

사색이 된 최풍원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놈아, 내가 아무리 물욕에 눈이 멀고 니 놈이 이문에 밝다 해도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느니라. 내가 처음 이곳에 와 물정을 잘 알지는 못하겠으나 여러 아전들의 말을 들어보니 제일 적임자가 너라고 생각하여 막중한 세곡 운반권을 맡겨 볼 요량이었다. 세곡은 나라 살림의 근본이라 청풍 인근에서 만일에 불상사가 일어나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없어 너에게 맡기려 했던 것이고, 난장을 트는 것은 관아에서 처결할 사안도 있고 여러 장사꾼들과 백성들의 이해가 걸려 있어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하찮은 상놈 주제에 주안상 하나로 관을 능멸하려 하는가!”

“소인 놈이 소견이 짧아 높으신 뜻을 모르고 한 일이니 부사 영감께서 하해 같은 너그러움으로 부디 용서하여 주시오소서.”

최풍원이 이마를 땅에 박은 채로 용서를 빌었다.

“부사 영감, 제발 고정하시고 좌정하시지요?”

“어리석은 백성이옵니다. 모르고 한 일이라 하니 한 번쯤 용서하시지요? 영감!”

여러 아전들이 노여움을 풀 것을 고하며 장승처럼 서 있는 이현로를 붙잡아 앉혔다. 최풍원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엎드려 일어서지를 못했다.

“사람이 은혜를 아는 것은 짐승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어찌되었든 네가 나로부터 덕을 입었으니 네가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느냐? 그것을 빙자해 나와 흥정을 하려 해?”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부사 영감!”

최풍원이 거듭 용서를 빌었다.

“일어서거라! 난장 문제는 내가 여러 아전들과 상의해서 결정할 것이니라.”

이윽고 부사 이현로가 코를 땅에 박고 있는 최풍원에게 일어날 것을 명령했다.

“감사하나이다!”

최풍원이 머리를 조아리며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여태 수많은 부사를 만나왔지만 이번처럼 혼이 난 적은 없었다.

“여보게, 최 행수! 뭘 하고 있는 겐가? 부사 영감께 약주 한잔 올려야지!”

어색해져 있는 분위기를 바꾸려 형방 김개동이가 우물쭈물 하는 최풍원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부사 어른, 소인 놈 잔 받으시고 노여움을 푸소서.”

최풍원이 잔을 머리 위로 높이 들며 술을 권했다.

“자네도 한잔 하게!”

최풍원이 권한 술을 단숨에 들이켠 이현로가 그 잔을 곧바로 최풍원에게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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