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누드: 미술작품에는 벗은 여자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3) 시장에서 매매되는 여성들의 누드

19세기 중반 양성적인 성매매 소재 적극 발굴…시장서 인기
품위 손상되지 않도록 과거·다른 국가의 성매매 소재 삼아
‘바빌로니아 결혼 시장’ 대기줄에 있는 여성들의 표정 눈길
미술품 경매서 6000기니에 낙찰…당시 작가 작품중 최고가
제롬 ‘노예시장’ 화면 중앙 여성의 나신 적나라하게 보여줘
역사적 사실 그렸을뿐 비도덕적 감정 끼어들 자리 없다고 여겨

에드윈 롱 ‘바빌로니아 결혼 시장’ 1875(왼쪽), 장-레옹 제롬 ‘노예시장’ 1866년경.
에드윈 롱 ‘바빌로니아 결혼 시장’ 1875(왼쪽), 장-레옹 제롬 ‘노예시장’ 1866년경.

[이윤희 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19세기 중반부터 유럽의 미술에는 여성들이 시장에서 매매되는 그림들이 양적으로 폭증한다. 19세기 중반 유럽이라면 이미 여러 분야에서 현대적 사고와 질서가 자리 잡히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미 일부일처제가 자리 잡혔기에 성매매는 음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당연히 비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때였다. 하지만 화가들은 양성적인 성매매의 소재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작품으로 옮겼고, 이 그림들은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 중 하나였다.

그림을 구매하는 고객의 취향에 화가들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화가 자신의 취향과 고객의 취향을 잘 버무리고, 또한 자신의 그림을 구매하는 이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되 품위가 훼손되지 않도록 도덕적 흠결이 없는 소재를 발굴하는 것도 화가들의 실력이라면 실력이었다. 따라서 화가들은 당대가 아닌 과거, 또는 다른 국가의 성매매를 소재로 삼았다. 당대의 것이었다면 당연히 도덕적으로 비난받았겠지만 저 멀고 먼 지역과 시대의 성매매를 그린 것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용인되는 것이었고, 그러한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역사적 한 장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영국 화가 에드윈 롱(Edwin Long)의 ‘바빌로니아 결혼 시장’은 한 눈에 여성 노예를 경매하는 장면처럼 보이지만, 뜻밖에도 ‘결혼 시장’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에드원 롱은 기원전 5세기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바빌로니아의 결혼 풍습에 대한 부분에 주목했다. 바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 남쪽에 위치한 고대 왕국으로, 이 시기 결혼은 돈이 많은 남성들이 여성들을 경매하는 시장에서 어리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사서 얼마든지 축첩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에드윈 롱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대영박물관에 머무르며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유물들을 면밀히 스케치했고, 그림의 배경에 벽면의 문양으로 그려진 사자와 나무 등의 형상들이 이 장면을 생생한 현장으로 만들기 위한 화가의 꼼꼼함을 증명해 주고 있다.

가로 3m가 넘는 대작 ‘바빌로니아 결혼 시장’에서 무대, 아니 상품을 진열하는 매대에 서 있는 여성은 뒷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여성이 두른 금빛 천을 벗겨내는 인물과 더불어, 화면의 왼쪽에 격정적으로 매물의 장점(아마도 외모상의 특징)을 설명하는 경매사가 손을 뻗어 여성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다. 화면의 맨 왼쪽에는 다음 순번으로 매대에 올라가게 될 여성이 거울을 놓고 마지막 단장을 하고 있다. 매대 앞쪽에 선 남성들은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들도 있고, 중년이거나 젊은 남성들도 있는데, 모두 중앙의 여성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으며, 여성을 구매하기 위해 보석함에 있는 보석을 내어주고 있는 남성도 보인다. 뒷모습의 여성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남은 삶이 결정될 운명적인 순간에 선 여성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그림 속의 주인공은 오히려 이미 매대에 상품으로 서 있는 여성보다는, 화면 전면에 앞모습으로 보이고 있는 대기줄에 있는 여성들이다.

왼쪽으로부터 거울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 침울한 표정으로 한쪽 무릎을 감싸 안고 화면 밖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이 있다. 그 옆에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명의 여성과 양 무릎을 세우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성도 보인다. 이어서 긴장감을 늦추려는 듯 웃으며 잡담을 나누는 듯한 여성들도 보이고, 될대로 되라는 듯이 발을 뻗고 뒤쪽의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여성도 보인다. 맨 오른쪽의 여성은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참는 듯이 보인다. 여성들 각각은 모두 개성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특정인의 초상처럼 보이고, 각각의 개성과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을 보는 관객들은 이 여성들을 차례차례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 것인가. 어떤 여성이 가장 아름다운지 순번을 매기게 될 것인가, 아니면 여성들이 처한 운명에 감정을 이입하게 될 것인가. 19세기 중후반 그림을 구매하는 고객이 어떤 계층과 성별이었는가에 그 답이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1875년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시 로얄 아카데미전에 출품되었고, 이듬해 남성 고객에 의해 6천기니에 구매됐으며 이 가격은 당시 생존 작가들의 작품가 가운데 최고가를 기록하였다.

여성 매매를 소재로 한 또 하나의 작품으로 장-레옹 제롬(Jean-Leon Gerome)의 ‘노예 시장’에는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여성 매매의 현장을 그리고 있다. 에드윈 롱의 ‘결혼 시장’은 그나마 어린 신부를 구하는 시장이었기 때문에 좀 더 보기에 덜 불편한지도 모르겠다. 제롬의 ‘노예시장’은 말이나 소를 사고파는 것 같은 장면으로 여성의 매매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의 ‘노예 경매시장’을 상상하여 그린 이 작품은 화면의 중앙에 적나라한 여성의 나신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 노예들은 주인의 성노예이기도 했고, 출산을 통해 후대의 노예들을 생산하는 역할도 해야 했기 때문에 신체의 아름다움과 건강함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러한 사실을 특별히 증명이라도 하듯이, 여성 노예는 구매 의사가 있는 남성에 의해 머리가 젖혀져 치아 검사를 당하고 있다. 전신을 낱낱이 보기 위해 벗겨진 옷가지는 여성의 발아래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이러한 치욕을 당할 또 다른 여성 노예들이 바닥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데, 얼굴을 가린 이도 있고,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이도 보인다. 이 상황을 알 리가 없는 어린 아이는 나뭇가지를 주워 바닥에 낙서를 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화면의 맨 오른쪽에는 검은 피부의 남성 노예가 비슷한 종류의 검사를 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아야 눈에 띌 정도로 그림 속 비중이 약하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누가 보더라도 중앙에 있는 아름다운 나신의 여인, 곧 노예로 팔려나가게 될, 곧 노역과 더불어 성적 학대를 당하게 될 여인인 것이다.

인권의 개념이 어느 정도 자리잡혀가고 있던 19세기 중반에 이렇듯 비인간적으로 신체 검사를 당하는 장면이나 줄을 서서 팔려나가는 장면들을 그리고, 또 이러한 작품들이 인기리에 고가로 팔려나갔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러한 그림들 속에서 관객은 도대체 무엇을 감상하고자 했던 것일까. 하지만 역사 속에 고전으로 남은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이러한 의문을 가지는 것은 그림의 조형미, 형식미, 혹은 역사성을 간과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비판을 하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그림들이 보여주는 조형미에 주목해보자. 이 그림들은 대부분 아주 매끈한 화면처리를 보여주고 있다. 격정적인 붓질이나 형태 과장 등을 사용하지 않고 마치 사진과 같은 차가운 표면을 구현함으로써, 관객은 작가가 역사적 ‘사실’을 노련하고 숙련되게 그린 것일 뿐 한 치도 비도덕적인 감정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화가들은 인물의 복장이나 건축적 세부 등을 철저하게 고증한 듯이 그림으로써 자신들이 묘사하고 있는 이 장면이 지금이 아닌 과거,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들은 이 부도덕한 여성 매매의 현장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여성들을 사고파는 그때 그 곳의 사람들은 미개했던 것이라고 여겨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들의 목적은 다른 문명권에서 자행됐던 비도덕적인 행태를 고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말인가? 오히려 그 목적은 자신들은 직접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과거 타문명의 장면을 통해 현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섹슈얼리티의 어두운 단면을 스펙터클하고 흥미진진하게, 하지만 체면이 깎이지 않는 범위에서 즐겼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한 번 더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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