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미륵리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낸 봉화수 일행은 하늘재를 넘기 위해 식전부터 길을 떠났다. 만수곡을 지나 포암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도랑을 건너자 하늘재로 오르는 길목에 오래된 절터가 나타났다. 절터는 송계계곡 끝자락에 있었는데,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수풀에 덮여있었다. 예전부터 인근 사람들은 그곳을 ‘미륵뎅이’라고 불렀다. 마을사람들은 무엇을 캐기 위해 산을 오를 때나 집안에 우환이 생길 때도 미륵을 찾아와 빌었다. 마을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재를 넘나드는 모든 나그네들이 무탈을 빌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미륵은 수풀이 우거진 절터 가장 위쪽 금당에 북향을 하고 서있었다. 금당은 지붕이 훼손된 채 석실만 남은 법당에 돌 갓을 쓴 미륵불은 오랜 풍상을 겪으며 우뚝하게 서 있었다. 절집은 한 채도 보이지 않고 곳곳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석물들로 보아 이미 오래전 산문을 닫은 폐사지만 석탑과 서 있는 돌부처, 남아있는 유적의 규모로 보아 예전에는 꽤나 번성했던 절집으로 보였다.

“형님, 저 갓 쓴 미륵 상당구리가 어째 보이시우?”

오슬이가 어른 키의 두어 배는 족히 넘을 듯한 서 있는 부처를 가리키며 봉화수에게 물었다.

“뭔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는 게냐.”

봉화수가 관심도 없다는 듯 지나가는 소리로 되물었다.

“빨랑 답해 보슈!”

“어째 보이긴, 찡그리고 있구나.”

이제 막 떠오른 아침 해에 사광으로 비친 부처 얼굴은 돌갓 그림자가 드리워져 봉화수 눈에는 찡그린 것처럼 보였다.

“내 그럴 줄 알았수!”

오슬이가 봉화수를 쳐다보며 낄낄거렸다.

“싱거운 놈!”

봉화수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오슬이에게 말했다.

“형님! 저 부처 얼굴이 웃는 것처럼 보이면 착한 사람이고, 화난 것처럼 보이면 나쁜 놈이래요. 고로 형님은 나쁜 놈이라는 증거요. 내 눈엔 부처가 훤하게 웃고 있구먼유!”

“좋겄다, 네 눔은 착해서!”

“형님! 저어기 바위 위에 올라앉은 둥그런 돌이 뭔지 아우?”

오슬이가 이번에는 미륵불 왼쪽 도랑가에 있는 바위 위에 올려져 있는 물동이만한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랴?”

“바보 온달 있잖수? 그 바보가 힘자랑 하던 공깃돌이래요.”

“아무리 힘 센 장군이라 해도 힘이 얼마나 쌨기에 저 큰 돌로 공기를 했겠냐?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어서 길이나 서두르거라!”

봉화수가 오슬이에게 핀잔을 주며 일행들에게 길을 재촉했다.

미륵사지를 지나자 곧바로 오른쪽으로 역원 터가 나왔다. 하늘재로 오르는 초입이다. 역원터 역시 절터처럼 수풀에 묻혀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이미 오래였다. 역원은 중앙과 지역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중요한 길목마다 나라에서 설치한 일종의 국영 숙식시설이었다. 이러한 역원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운용되어왔다. 그러니 하늘재를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저 역원터도 족히 천 년은 넘었을 터였다.

이런 역원이 한적한 미륵리에 있었던 것은 하늘재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미륵리와 관음리의 경계를 이루는 포암산과 부봉 사이를 넘는 하늘재는 백두대간의 주능선에 위치하여 한강 상류의 충청좌도와 낙동강 상류의 경상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계립령이라고도 부르는 하늘재는 이미 신라 초기에 개척되었으니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고갯길 중 최초로 개통된 가장 오래된 옛길이었다. 반도의 변방인 동쪽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신라는 하늘재를 개통함으로써 비로소 북진의 발판으로 삼는다. 경주에서 영천·상주·문경을 거쳐 하늘재를 넘으면 북방의 고구려 땅이었다. 신라가 하늘재를 개척한 이후 삼국이 쟁투하며 북쪽이 번성할 때는 남진의 통로요, 남쪽이 팽배할 때는 북진의 경로가 되었다. 하늘재가 번잡했던 때는 아무래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던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통일신라의 수도 경주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이때는 모든 길이 신라의 경주로 통했다. 모든 문물이 발달하고 물류가 집중되었던 신라 경주는 대륙은 물론하고 동남아와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드나드는 국제적인 도시였다. 하늘재를 넘어온 대륙의 문화는 경주를 통해 일본과 해외로 전파되었고, 바다를 건너온 다양한 문물은 경주에서 하늘재를 넘어 대륙으로 전해졌다. 하늘재는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도읍을 개경으로 옮긴 후에도 여전히 번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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