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연 청주시 복대2동 행정복지센터 주무관

1천원짜리 지폐 속 인물인 퇴계 이황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청렴한 삶을 살아 많은 이들의 본보기가 된 인물이다. 생각이나 헤아림을 멈춘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사색과 ‘경(敬)’을 중시했던 퇴계 이황 선생의 겸손하고 청렴한 삶과 일화는 유명하다.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길에 이황은 점심을 먹을 시간이 돼 잠시 쉬고 있는데 같이 따르던 하인이 어디선가 콩밥을 지어왔다.

이황은 하인에게 “쌀은 내 것이되 콩은 어디에서 나서 콩밥을 지어 왔느냐?”라고 물었다. 하인이 “예, 길에 있는 콩을 몇 개 따서 지었습니다. 길에 많던데요?”하자 이황은 그 밥을 먹지 않고 하인에게 콩 주인을 찾아 그 값을 치르고 사죄를 드리고 오라고 했다. 이황은 하인이 콩 값을 치르고 사죄를 드리고 온 후에야 그 콩밥을 먹었다고 한다.

퇴계 이황은 일생 학문에만 전념해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고, 깨끗한 청백리로서의 표본으로 상징된다. 그는 생애 일흔아홉 번이나 벼슬을 사퇴하며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68세가 되던 해에 선조의 제의로 대제학의 중임을 맡았으나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고, 마지막에 왕에게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해 바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명조실록’에는 그가 관직을 그만둘 때에 집에는 두어 말밖에 없었으며 하인도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관직에 제수돼 상경해야 할 때 의관조차 마련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빌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던 퇴계 이황은 1570년 11월 매화에 물을 주게 한 뒤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후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경복궁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와 외교문서 등을 작성해 명성을 떨쳤고, 마지막 죽는 날까지 남은 이들이 자신의 묘를 거창하게 꾸미고 삶을 과장할 것을 우려해 스스로 비문을 적어 남기어 그의 유언대로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도산에서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 이씨의 묘라는 뜻)’라고 쓴 작은 비석이 하나만이 남았다.

나라의 살림에 욕심내지 않고 평생을 학문에 매진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청렴한 삶을 살았던 이황의 정신을 공직자로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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