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누드: 미술작품에는 벗은 여자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1) 누드(nude) 혹은 벌거벗음(naked)
미켈란젤로 ‘다비드’ 인간 신체의 아름다움 증폭시켜 전달
안토니오 카노바 ‘비너스’ 누군가의 시선 경계하며 웅크린 모습
여성 누드는 행동하는 주체 아닌 시선의 대상으로 만들어져
작품 속에서 양성에게 보편적이지 않고 불평등한 관계 존재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1~1504(왼쪽), 안토니오 카노바 ‘비너스’, 1822~1823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1~1504(왼쪽), 안토니오 카노바 ‘비너스’, 1822~1823

 

[이윤희 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서양미술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옷을 입지 않은 인물상들이 다수 등장하고 그것을 우리는 ‘누드(nude)’라고 부른다. 춘화(春畵)를 제외하면 옷을 벗은 인물상을 볼 수 없었던 우리의 미술사 속에서 서양미술의 영향으로 갑자기 등장하게 된 ‘누드’를 번역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는 아예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누드를 처음 접하게 됐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응은 ‘아이고, 망측해라’였고 세태의 급작스러운 변화를 개탄하는 목소리들도 있었지만, 서양문물이 전방위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누드라는 용어, 그리고 누드화와 누드 조각상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서양미술에서 누드는 휴머니즘, 즉 인간중심주의의 발로라고 크게 해석된다. 옷을 입지 않은 인간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제작하는 것이 왜 휴머니즘과 연관이 되는 것일까. 여러 가지 학술적인 논거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누드는 인간이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된 서양 누드의 전통은 현대까지 강력한 전통으로 이어졌다. 물론 고대에는 인간상보다 신상(神像)이 더 많았지만 알다시피 그리스 신화라는 것은 인간적인 감정을 지니고 각자의 맡은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신들이 활동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인간’ 누드상으로 신상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신상이 아닌 원반을 던지거나 활을 쏘는 등의 현실적인 인물상들도 있는데, 실제로 고대 그리스 시절에는 신체적 기량을 겨루는 운동 경기가 옷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졌고, 경기에서 승리한 이들의 아름다우면서도 강한 육체는 찬양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때의 운동경기는 남성들만의 축제였기에, 모든 경기자상이 남성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간 신체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조각의 전통은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하던 중세에 사라졌다. 인간은 신의 금기를 어긴 원죄를 범한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의 아름다움을 논할 자격이 없고 다만 속죄의 마음으로 현세를 살아가는 것이 권장되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가 옷을 입지 않은 상태로 그려지는 중세의 주제는 태초의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기 이전 상태의 모습이거나, 지옥에서 끔찍한 벌을 받는 모습을 때였다. 중세의 지옥도는 인간의 신체가 어디까지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그려냈고,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은 결코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세계관의 대전환이 일어났던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인간의 신체는 다시 주목을 받는다. 고대인들처럼 인간을 아름답고도 강하고 매력적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여전히 기독교 신앙이 중요했던 르네상스인들은 한 가지 해결책을 찾아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 속에서 누드로 그릴 만한 대상을 찾아냈던 것이다.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Michelangelo)가 제작한 ‘다비드’는 구약에 등장하는 영웅이자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청년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보면, 과연 누드라는 것이 인간 신체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증폭시켜 전달하는 것인지 느낄 수 있다. 구약 속의 다비드는 돌멩이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외침으로부터 구하는 인물로, 미켈란젤로는 돌을 던지기 직전의 긴장된 다비드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비드는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표적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 상대 골리앗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지만 마치 다비드상의 눈길이 향하는 지점에 거인 골리앗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다비드의 온 몸의 근육은 돌을 던지는 행위에 집중되어 매우 긴장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다비드의 양 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한 손으로는 돌을 움켜쥐고 있고 다른 손으로는 돌을 맨 끈을 어깨에 걸치고 있으며 그 끈은 등 뒤에서 양 손을 이어주고 있다. 어깨에 걸친 것이 투석(投石)을 마치고 입을 옷이 아니라 무기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비드는 완전히 벗은 상태로 서 있지만 자신의 신체를 조금도 가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는 자신의 신체를 관객에게 노출하여 보여주는 인물이 아니라, 관객이 서 있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자신의 과업에 몰두하는 중이다. 이러한 특성에 주목한 영국 미술사가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는 ‘누드’와 ‘벌거벗음’을 이렇게 구분한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옷을 걸치지 않았다는 뜻이며 이는 우리들 대부분이 벌거벗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을 함축하고 있다. 반면 누드라는 단어는 제대로만 사용된다면 어떠한 불편한 의미도 함축하지 않는다. 누드라는 단어가 우리의 마음속에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는 무방비의 웅크린 몸이 아니라 균형 잡히고 건강하고 자신감 있는 몸, 즉 재구성된 신체이다.”

즉, 벗은 것을 의식하고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하는 신체가 아니라 신체의 균형과 아름다움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것이 바로 누드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드를 정의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며 현재까지 가장 큰 설득력을 가지는 클라크의 주장이 남성 누드가 아닌 여성 누드에도 적용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이미 크니도스 섬의 비너스를 보았다. 한 손으로는 옷을 그러쥐고 다른 손으로는 음부를 가리고 있던 기원전 5세기의 이 비너스는 당시에도 그리스의 작은 섬 크니도스에 이를 보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들이 넘쳐날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조각상을 쓰다듬고 껴안는 사람들도 있을 만큼 남성의 욕망을 자극했다는 이야기는 전편에 다룬 바 있다. 크니도스 섬의 비너스가 그려내고 있는 여성 신체는 너무도 완벽하게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마치 현실의 여인처럼 옷을 벗은 것에 당황하고 있어서 더욱 실감이 났을 것이다.

이러한 여성 누드의 양상은 후대로 올수록 더욱 강력해졌다. 19세기 초반 이탈리아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의 ‘비너스’는 옷으로 몸을 가리고 누가 볼까 주위를 살피며 거의 도망치고 싶어 하는 인물로 비너스를 그리고 있다. 옷으로 급하게 몸을 가렸지만 입지는 못한 상태이고, 가린다고 가렸어도 가슴이 노출되고 있으며, 뒷모습은 훤히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몸을 웅크려 최대한 노출을 줄이고 옷을 입지 못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이 비너스는 ‘누드’인가 아니면 ‘벌거벗은 인간상’인가. 클라크의 누드에 대한 정의는 남성상에는 적당하지만, 명백히 ‘무방비의 웅크린 몸’을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여성상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크니도스 섬의 비너스가 가졌던 특성을 카노바는 한층 더 강화했기 때문에, 이 비너스상은 균형 잡히고 건강하고 자신감 있는 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현실적 섹슈얼리티와 관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카노바의 비너스는 누구의 시선을 경계하여 급하게 몸을 가리고 있는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비너스 탄생은 어찌어찌하여 물에서 태어났다는 것이지 물에서 나와 당황했다는 대목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비너스가 겁내는 대상은 신화 속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현실의 관객, 그 중에서도 남성 관객인 것이다. 남성 누드상이 누가 자신을 바라보든 전혀 의식하지 않는 반면, 여태까지의 많은 비너스상들은 관람객의 시선에 노출되는 것을 명백하게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여성 누드는 신화 속에서 행동하는 주체가 아닌 시선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보여주기 위한 신체이다. 남성 관객의 시선을 애초에 의식하고 있는 여성 누드는 신화 속에서 빠져나와 현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남성 누드와 여성 누드의 차이를 비교하며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지점은, ‘누드’라는 서양미술 속의 개념이 양성에게 보편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미술작품 속에서도 남성은 행동하는 주체이고, 여성은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점, 즉 주체와 대상의 불평등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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