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시선: 불쾌한 시선을 견디는 방법
(4) 너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
바바라 크루거 1981년 作 ‘너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
이미지와 텍스트 병치…간결함 속 강력한 메시지 전달
여성 조각상을 바라보는 남성의 에로틱한 시선 지적

바바라 크루거 ‘너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 1981(사진 위부터), 로리 앤더슨 ‘전자동 니콘(대상, 거부, 객관성)’, 1973.
바바라 크루거 ‘너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 1981(왼쪽), 로리 앤더슨 ‘전자동 니콘(대상, 거부, 객관성)’, 1973.

 

[이윤희 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마네의 ‘올랭피아’는 시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도발적으로 제시했다. 그림 자체를 누가 보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당연히 관객이 그림 속 인물이나 풍경을 보는 것이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올랭피아’가 전시될 당시 주요 관객층은 누구였을까. 이 그림이 그려지고 전시되던 19세기 중반은 동물화가의 대가 로자 보뇌르가 마시장이나 우시장에 그림 소재를 스케치하러 갈 때 바지를 입고갈 수 있도록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하던 때였다. 남성의 에스코트 없이 길거리를 혼자 다니는 여성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 취급을 받던 때였다. 이때 프랑스의 살롱전이든 낙선전이든 그것을 관람하는 주체 역시 대개 남성이었고, 남성과 함께 온 여성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볼 것이라고 상정하는 관객은 남성 일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저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의 입장보다 더 적극적으로, 화가에게 그림을 주문하는 이들도 압도적으로 권력층의 남성이었으며, 이로써 그 많은 여성의 누드화가 미술사에 남은 의문이 풀린다.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는 그림 속 여성이 일방적으로 구경거리가 되어 왔던 이러한 역사에 의문을 제기한다. 크루거의 1981년작 ‘너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Your gaze hits the side of my face)’는 사진과 텍스트로 이루어진 계몽 포스터 같은 느낌의 작품이다. 바바라 크루거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광고와 잡지의 그래픽 디자인을 제작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 대중의 주목을 끄는 방식, 그리고 이미지와 함께 병치되는 텍스트의 위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크루거는 자신의 메시지를 포스터와 같은 형식으로 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포스터가 메시지를 정확하고 빠르게 전달하는데 반해, 크루거의 메시지는 시간을 들여 생각하게 만든다. 텍스트와 함께 등장하는 이미지 역시 명확하게 읽히기보다는 애매모호하게 제시되기 때문에, 관람자가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너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에는 여성 조각상의 옆모습이 보인다. 언뜻 보아서는 조각상의 출처조차 명확하게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 위에 한 마디 한 마디씩 또박 또박 끊어 읽으라는 듯한 텍스트가 세로로 올려져 있다. ‘Your’,  ‘gaze’, ‘hits’, ‘the’, ‘side’, ‘of my’, ‘face’, 즉 네가 쳐다보는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는 말이다. 여기서 ‘You’는 누구인가. 바로 당신, 이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을 말하는 것인가? 누구의 뺨을 때린다는 말인가? 손이 아니라 쳐다보는 시선이 뺨을 때린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이 작품 속에 옆모습으로 있는 조각의 뺨을 당신이 바라보는 것만으로 때리고 있다는 것인가?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인 내가 무슨 폭력이라도 행사했다는 말인가?

이미지와 작품의 결합만으로 바바라 크루거는 관객으로 하여금 여러 의문을 가지게 하는데 성공했다. 바바라 크루거는 다른 작품에서도 늘 대명사를 포함한 문장들을 사용하여 그 앞에 선 관객들을 당혹시킨다. ‘you’, ‘your’, ‘I’, ‘my’, ‘me’ 등의 대명사는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관람자를 작품 내용의 관련자로 강력하게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인물 조각상은 여성이 미술작품으로 재현되어 왔던 전통이다. 한 손으로 음부를 가리고 다른 손으로 옷을 든 채 어정쩡하게 서 있던 크니도스의 비너스 이래 여성 조각상은 너무도 쉽게 관음증적 시선의 대상이 되어 왔다. 조각가였던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조각한 여인상을 사랑하게 되어 함께 자고 입 맞추고 지극한 정성을 쏟아, 체온을 가진 여성으로 생명을 가지게 되어 그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피그말리온 신화’ 역시, 실제의 여성이 가질 수 없는 완벽한 신체의 여성 조각상을 조각상이 아닌 여성으로 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크루거는 일차적으로 여성 조각상을 바라보는 남성 일반의 에로틱한 시선을 지적하고 있다. 에로티시즘 자체는 성별이 구분되어 있는 인간에게 당연한 감정이지만, 그 시선의 방향이 일방적일 때 그것은 시각적 통제, 폭력성의 관점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각상이 아닌 현실의 여성들은 이러한 시선들로부터 자유로울까? 이에 대해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은 ‘전자동 니콘(대상/거부/객관성)(Fully Automated Nokon(Onject/Objection/Objective)’ 연작에서 길거리에서 만난 폭력적인 시선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초점을 맞추고 섬세하게 거리를 조정해야 하는 수동 카메라 대신 전자동 카메라를 손에 넣은 앤더슨은 그것을 들고 거리를 나섰다. 풍경이나 인물 그 무엇이든 즉각적으로 사진에 담을 수 있는 전자동 카메라를 들고 나선 앤더슨은 전에 없는 활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길에 나선 앤더슨에게 “어이, 아가씨, 외로워 보이네?” 식으로 말(수작)을 걸어오는 예의 그 남성들이 순간적으로 불쾌감을 주었다. 전에는 그들에게 대답을 하느니 못들은 척 외면하고 걸음을 서둘렀을 앤더슨은 발길을 멈추고 카메라를 들이대 그들의 사진을 찍었고, 그렇게 제작된 여덟 장의 사진을 인화하여 전시를 개최하였다. 1973년의 이 작품에 대해 앤더슨은 1994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나는 길거리에서 나를 품평하는 남자들의 사진을 찍기로 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사생활을 침해하는 짓이 늘 끔찍스러웠는데 드디어 그런 남자들에게 보복할 수단이 생긴 것이다. 전자동 니콘 카메라를 들고 휴스턴 가를 걸어갈 때는 무장하고 준비가 완료된 기분이었다. 한 남자 앞을 지나는데 그가 중얼거리며 말을 건넸다. “내가 따먹어줄까?” 이것은 일반적인 수법이다. 여자가 지나갈 때 남자는 최대한 가까이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공격을 한다. 감히 맞설 용기가 있어야만 여자가 되돌아 설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휙 돌아서서 거칠게 물었다. “방금 이야기한 게 너야?” 그가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맞대응했다. “그래. 씨X, 그럼 어쩔건데?” 나는 니콘을 들고 그 남자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며 오락가락, 혹시 비밀경찰인가? 찰칵.”

앤더슨은 사진을 찍는(shooting) 행위가 가진 공격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에서 당하는 시선의 공격과 불쾌한 말에 대항하여 마치 무기로 공격하듯이, 그는 카메라를 들이대서 사진을 찍었다. 앤더슨이 가던 길을 되돌려 카메라를 들이대는 행위만으로도 남성들은 강압적인 분위기를 느끼고 당황했다. 때로는 사진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찍을테면 찍으라고 포즈를 취하는 남성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일방적인 시선은 종료되고 쌍방이 맞서 바라보는 형국으로 이 상황은 종료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진 찍힌 남자들을 전시하면서 앤더슨은 그들의 눈 부분을 하얗게 지웠다. 이것은 길거리 남성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을 수도 있다. 킬킬거리는 얼굴은 남겨놓되, 그들이 정확하게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는 없도록 말이다. 하지만 눈 부분을 지운 것은 그들이 마음대로 길가는 여자들을 쳐다보던 바로 그 시선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선의 폭력성, 공격성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그들의 눈을 지워 더 이상 함부로 쳐다보지 못하도록 하는 경고이기도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선이 지워진 그들은 웃고 있는 얼굴들이어도 어쩐지 범죄자 같은 느낌을 준다. 단순히 길에서 여성을 향해 웃는 남자들의 얼굴이 아니라 지명수배범같은 느낌을 줌으로써,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받는 시선의 공격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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