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기 교수의 티베트 기행 ⑪

   
 
  ▲ 해발 5천120m의 팡라(pang-la)고개위 에서 바라본 히말라야 산맥. 초모랑마(에베레스트)는 구름에 가리고 풍유비둔(豊乳肥臀)이 연상되는 산들이 탐스럽다.  
 

뉴팅그리(定日)에 도착, 주봉빈관에 방을 정하고 식당엘가니 우리 일행외에 서양인 두팀이 식사를 하며 담소중이다. 이들도 아마 우리와 같이 초모랑마(에베레스트) B·C를 다녀올 팀 아니면 곧바로 국경을 넘어 네팔로 갈 사람들일 것이다.

10일 아침 초모랑마 베이스 캠프를 가기 위해 새벽에 출발한다. 약 5㎞를 가니체(che)라는 마을에서 초모랑마 자연보호 입장료를 지불하고 통과한다.

날씨가 맑으면 왼쪽으로부터 마칼루, 로체, 초모랑마, 초오유 등의 히말라야 연봉들이 보일 터인데 먹구름이 짓누르고 있어 자칫하면 비오는 비포장 산길을 걱정할 형편이다.

해발 5천120m의 팡라(pang-la)고개에서 내려 정선생은 올라온 고갯길을 촬영하러 아랫쪽으로 내려가고 필자는 고개위 산을 오른다. 30여분을 걸어 올라가니 앞이 확 트인 끝에 히말라야가 더욱 가까운 것 같으나 역시 구름이 걷힐것 같지가 않다.

구름아래의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없는 겹겹의 둥글둥글한 육산들이 웅장하다.

연상되는 것을 곧이곧대로 표현하자면 풍유비둔(豊乳肥臀), 풍만한 젖가슴과 살찐 엉덩이가 다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고려의 대선사 일연(一然)이 읊은 시 중에,

천축국 하늘 높이 치솟은 설산
죽을 힘을 다하여 기어 오른 수도승 애처로워라
몇번이나 달이 떠서 조각배 되어 갔으랴만
구름따라 돌아온 스님 하나 못 보았네

라는 시가 있다. 인도로 가기 위해 히말라야산맥을 넘는 스님은 많았으나 되돌아 오는 스님은 적었다는 애석한 내용이다.

신라의 혜초가 7년 걸렸고 삼장법사가 16년이나 소요했다는 그 길이 아마 이 길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뿐숨 고르는라 잠깐 앉아 있는 주위로 고적감이 엄습해 온다. 말없이 걷는 고산의 무음행보(無音行步), 그들도 그랬을거라는 생각으로 관절을 달래며 산을 내려온다. 점심은 차안에서 빵과 과자 부스러기로 때우고 강행군해 베이스캠프 가까이 접근하는데 고도에 어울리지 않게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웬만하면 좀 걷고 촬영을 하겠는데 빗줄기가 사나워 엄두가 나질 않는다. 10여분을 기다려 보지만 초모랑마봉은 구름에 가리고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아 되돌아가기로 한다.

온길을 되짚어 가다가 갈래길에서 네팔 카트만두까지 가는 중니공로(中尼公路)상의 올드팅그리(老定日)에서 숙박하기로 하고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산길, 돌길을 찾아가며 달린다. 간혹 꽤 높은 고지인데도 유목민들의 양떼를 만나기도 하고 또한 그들의 천막 토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저녁무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초모랑마를 등지고 험하디 험한 길을 헤치고 나오니 저 멀리 초원 끝에 옹기종기 낮게 앉아 있는 마을이 보인다. 빤히 보이는 데도 한시간 가까이 평야를 달려 해질녘에 초모랑마의 테라스라는 별명의 올드팅그리에 도착, 길 아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푼다.  이곳은 네팔로 가는 여정의 마지막 밤을, 그리고 티베트로 들어가는 여정의 첫 밤을 보내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평야 가운데에 있어 유목민 텐트도 보이고 초모랑마와 초오유봉의 테라스라고 할 만큼 그 봉우리들이 빤히 보이는 마을로도 유명하나 오늘은 구름이 짙은 날씨 탓에 방향만 알뿐 산은 보이질 않는다. 게스트하우스도 지저분하고 열악해 밤에 화장실을 먼저 다녀온 장사장이 기가 막힌 곳이라고 해 겸겸해서 가보니 쭈그려 앉아 있기도 불편하려니와 하늘이 뻥 뚫려 별을 세며 일 보는 건 그렇다 치고 궁둥이 시려워 오래 있을 수가 없다.

식당엘 가니 서양인 몇명과 티베트인들이 빙 둘러앉아 식사를 한다. 선택할 것도 없이 음식이 나온다. 허름하게 입고 소박하게 먹는 조의조식(粗衣粗食)의 티베트인,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호의호식하는 우리들 보다 밝았다.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고 한 달라이라마의 말이 티베트여행을 끝내 가는 무렵에서야 납득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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