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최풍원이 권 교리를 찾아갔다. 권 교리는 그야말로 선비였다. 세상이 아무리 썩었다고 해도 세상이 망하지 않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 어느 곳에선가 맑은 물을 흘려주기 때문이었다. 권 교리는 고결하고 참으로 맑은 사람이었다. 최풍원이 봉화수를 거두어 장사를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비치자 권 교리는 자신의 머슴인 봉화수를 선뜻 내주었다. 자신의 일신상 편안함을 위해 젊은 아이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날부터 봉화수는 북진여각 최풍원의 수하에서 장사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대체로 여각이나 객주집에 어린 나이로 들어오면 동몽회에 들어가거나 자질구레한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봉화수는 처음부터 보상객주들을 따라다니며 장삿일을 배웠다. 그리고 최풍원은 강수를 시켜 봉화수에게 택견을 가르치게 했다. 보부상 중에 봉화수처럼 어린 장사꾼은 없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셈하는 것만은 뛰어나 평생을 길 위에서 보낸 나이 많은 보부상들조차도 입이 벌어졌다. 대부분 보부상들이 날일(日) 자 하나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는 까막눈 처지로 기억에 의존해 장사를 하고 있었지만, 봉화수는 서당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글 솜씨를 장사에 써먹었다. ‘주먹구구에 박 터진다’고 어림짐작으로 대강 셈을 하다 수없이 낭패를 보았던 보부상들에겐 봉화수의 장사 방법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봉화수가 천자문을 읽고 소학이나마 좀 읽게 된 것은 교리 서당골의 훈장님 덕분이었다. 상놈에다가 남의 집 머슴을 사는 주제에 서당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지만 농삿일을 하거나 나무를 하던 중에도 틈이 날 때마다 서당 담벽에 지게를 벗어놓고 학동들이 읊어대는 소리를 따라 응얼대곤 했다. 이를 기특하게 보신 훈장님이 봉화수를 받아들여 틈틈이 가르치셨다. 그 덕분으로 봉화수는 그나마 까막눈을 면하게 되었다. 봉화수는 훈장님이 고마워 북진본방으로 오기 전까지 내리 수년을 훈장님 댁에 땔나무를 해다 드리는 것으로 글세를 대신했다.

봉화수는 총명해서 장사를 배우는 솜씨도 빨랐다. 보부상들을 따라다니며 장사를 배운지 겨우 한 해 남짓 만에 웬만한 것은 혼자 처리를 할 정도가 되었다. 거기에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고 사람들을 다루는 수완도 남달랐다. 한마디로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화수눔은 되로 배워 말로 풀어먹는 놈이여.”

“저렇게 머리가 필필 돌아가는 놈은 처음 보는구먼.”

장사에 이골 난 보부상들도 봉화수의 상술에 혀를 내둘렀다.

그것이 팔년 전이었다. 대행수 최풍원의 눈에 띄어 북진여각으로 올 때만 해도 솜털이 뽀송뽀송하던 봉화수가 이제는 어엿한 사내가 되었다. 보름달처럼 환하게 핀 얼굴에 뚜렷뚜렷한 이목구비, 훤칠한 키는 누가 보아도 탐을 낼 정도의 총각으로 변해 있었다. 아무리 수줍음이 많은 처자라도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봉화수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면 애간장이 녹아내릴 정도였다. 양친 중 어느 쪽 한 분이라도 계셨다면 스물 하고도 두 해를 넘어가는 노총각 아들을 지금까지 그냥 두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노름빚으로 줄행랑을 놓고 어머니가 황 심보에게 욕을 당해 목숨을 끊은 이후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처지이다 보니 그 흔한 매파 한 번 발걸음이 없었다. 최풍원 대행수 역시 안식구를 잃고 외동딸 숙영이만 바라보며 살아온 지 십 여 년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최풍원은 봉화수를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중이 제 머리 깎지 못하듯’ 내색하지 못하고 있었다.

“객사로 나가보세.”

객사에서 북진임방 객주들의 식사시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즈음 최풍원이 말했다. 객사에는 아침밥을 마친 객주들이 웅성웅성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최풍원이 객사 안으로 들어섰다.

“어제는 불미스런 일로 인해 도중회 모임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 당면한 문제를 상론했어야 하는 데 내가 부덕한 탓으로 객주 여러분들의 불안이 크리라 생각됩니다.”

“대행수 어르신! 어찌 그게 행수님 탓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소이다! 대행수로서 도중회를 잘 이끌지 못했으니 내 책임이지 않고 누구의 책임이겠소이까?”

“느닷없이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어째서 대행수 잘못입니까요? 송만중이 놈 문제지요!”

서창객주 황칠규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손사래까지 치며 아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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