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수 어르신, 도중 객주들이 제일 불안해하는 것은 농번기가 시작되는 데다, 계속된 흉년으로 장에 내놓을 물산들이 없는 데 성시가 될까 우려하고 있습니다요.”

“구색 갖춰 제사 지내려면 이런 흉년에 조상은 만날 굶을 걸세. 사람이 시절에 맞춰야지 시절이 사람 사정 맞추겠는가? 아무리 흉년이라 내놓을 물건이 없다고 해도 그건 기우일세. 가을처럼 곡물처럼 풍성하지는 않겠지만 외려 곡물이 없는 대신 다양한 물산들이 쏟아져 나올 걸세. 생각을 해보게. 추수 때라면 집집마다에서 거둬들인 곡물들이 있어 장마당에 내놓는 것이 곡물이겠지만, 지금쯤이면 대부분 양식들이 떨어지고 농사철이 시작되어 농사를 지으려면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네. 그럼 어찌해야 되겠는가? 애지중지하며 급할 때 쓰려고 꼭꼭 숨겨놨던 비상 물목이라도 내놓아야지 별 수 있겠는가?”

역시 최풍원 대행수는 봉화수보다 여러 수 위였다. 고수일 뿐 아니라 큰 장사꾼이었다. 봉화수는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 보고 있었지만 최풍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이면까지 읽고 있었다. 장사는 물건만 매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이치까지도 깨우쳐야 한다는 것을 봉화수는 최풍원을 통해 어렴풋하게 배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봉화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런 어려운 시기에 과연 최풍원의 말처럼 난장이 제대로 틀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슬금슬금 솟아올랐다.

“믿고 따르게!”

최풍원이 봉화수의 의구심을 눈치 챘음인지 확신을 주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최풍원이 봉화수를 처음 만난 것은 청풍나루에서였다. 한 일곱 해이던가 여덟 해 전쯤 백중날이었다. 백중이 되면 그동안 열심히 일하던 농부들이나 머슴들이 바쁜 일손을 잠시 놓고 하루를 노는 날이었다. 사람들이 손을 놓고 하루를 맘껏 쉰다하여 ‘호미 씻는 날’이라고도 했다. 지주집이나 농가에서는 봄부터 여름내 뙤약볕 아래서 힘겹게 일한 머슴들을 위로하기 위해 백중날이 되면 하루를 쉬게 해주었고, 주인은 그들의 손에 용돈을 조금씩 쥐어주었다. 일꾼들은 그 돈으로 장마당에서 술도 먹고 투전판에서 돈을 날리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해에 한 번 뿐인 이 날이 농부들이나 머슴들에게는 명절날이나 다름없었다. 한해 중 장마당에 가장 먹을거리가 넘쳐나고 볼거리가 많은 장이 백중장이었다. 장마당에는 남사당패들이 농악을 치며 온갖 기술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힘깨나 쓴다고 으스대는 사람들은 힘겨루기를 하느라 씨름판이 벌어졌다. 곡물·어물·포목·과실·옹기장수는 물론이요, 노름꾼에 복술쟁이, 인근 무뢰배들까지 모두 장마당으로 몰려들어 백중장은 사람들이 들끓고 물산들이 넘쳐흘렀다. 동몽회원들과 백중장을 둘러보던 최풍원의 눈에 나루터에서 뱃꾼과 흥정을 벌이고 있는 사내아이가 눈에 띄었다.

“선주 어른, 오늘같이 좋은 날을 놓치면 배 밑창에서 다 썩어 문드러지고 말 거요!”

“이 녀석아! 썩든 말든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그러지 말고 제게 넘겨 주셔요.”

“글쎄, 그 금에는 안 돼!”

“아무리 간절이라고 해도 오늘 같은 염천에 여러 날을 후덥지근한 배 밑창에 저렇게 처박아놓으면 그놈이 소금 덩어리가 아닌 다음에야 썩지 않고 배기겠어요? 지금이라도 싸게 넘겨주면 본전은 건질 수 있겠지만 오늘이 넘으면 거름더미에 버려야 할 걸요!”

“버리더라도 그렇게는 안 돼!”

“장사가 벌려고 하는 건데 선주어른은 버릴 물건 한 푼이라도 건져서 좋고, 저는 필요한 사람에게 넘겨 입맛 돋우니 좋고 꿩 먹고 알 먹는 것 아니에요?”

뱃꾼이 귀찮아하며 더 이상 말하기도 싫다는 듯 잘라 말했지만 사내 녀석은 지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선주 어른은 눈이 어두워 잘 뵈지 않는가본데, 저 생선이 이미 흐물흐물해진 것이 가시가 생기려고 하는 안 보이오? 썩어 버리기 전에 차라리 제게 넘겨주슈!”

열서너 살이나 됐을까, 아직도 솜털이 채 가시지도 않은 앳된 사내아이가 당차게 흥정을 벌였다.

“너 호패는 있느냐? 호패도 없는 어린놈이 참 질기구나!”

한양에서 짐을 싣고 올라온 뱃꾼과 흥정하는 사내 녀석이 얼마나 당차게 물건을 흥정하는지 평생 장사로 굴러먹었을 경강상인도 쩔쩔 매고 있었다.

“가시 생기면 딴 물건도 다 버려야 할걸요?”

어린 녀석이 구더기 얘기로 다시 한 번 경강상인에게 엄포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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