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충청매일] 강서동 휴암고개를 들머리로 삼아 부모산성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에서 내려다보니 강서동 반송 마을도 이제는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서서 작은 도읍을 이루었다. 부모산 녹음은 절정을 이루고 등산로 주변에는 여러 가지 꽃을 피워서 아름답다. 곳곳에 양지꽃, 제비꽃이 피었고, 등나무 연보랏빛 꽃이 은은한 향기를 흘리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어떻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따를 수 있을까.

부모산성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성벽이 정상 부분을 동그랗게 테를 두르듯이 둘러싸고 있다. 사람들이 성벽 위를 밟고 다녀서 길이 되어 버렸다. 안내판의 그림에서 보는 부모산성은 지형을 이용해 성벽을 구축하여 전체적으로 역삼각형 모양으로 보였다. 성벽은 거의 다 무너져서 돌무더기가 되어 버렸다.

돌무더기를 조심스럽게 디디고 내려가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울퉁불퉁한 돌이 무질서하게 무너져 내렸다. 기저 부분은 성의 본래의 모양이 남아 축성을 방식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석공들이 돌을 다듬는 모습, 무너지기 전의 모습 등을 상상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성벽 위로 난 길을 걸으면서 작은 기와조각이나 토기조각을 찾으려고 돌무더기를 살폈다. 돌무더기 속에서 기와조각 몇 개를 주웠다. 빗살무늬가 선명하고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건물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지휘소나 성문이 있었을 것이다. 안내문에는 동, 서, 남, 북 4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강자갈도 몇 개 보였다. 대개 산성 안에서 강자갈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격전지였음을 말해 주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서쪽 사면으로 돌아가자 석성이 끊어진 듯이 문득 멈추어 버린다. 성은 갑자기 북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이곳에서 재단법인 중원문화연구원에서 발굴 조사한 북문지가 보였다. 중원문화연구원의 발표에 의하면 이곳을 중심으로 송절동과 화계동 일대에 커다란 정치 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전기에서 볼 수 있는 토광목관묘, 토광목곽묘 유적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는 백제의 유물이 대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4세기경에 백제가 이곳에 진출하여 확실하게 지배했을 가능성을 발굴 결과 추정하고 있다.

청주가 4세기경에도 백제 문화권에 속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치 사회의 문명이 깨어나는 시기에 백제 문화를 바탕으로 했다면 청주시민의 정신세계에 백제의 정치 철학이 원형적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제 역사가 상당 부분 왜곡되고 땅에 묻힌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문화도 정치적, 경제적 강자에 의해 그 기본 정신이 좌우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씁쓸하기 한량없다.

신봉동의 백제 유적, 청원 낭성의 고구려 유적, 보은 삼년산성과 문의 양성산, 구룡산의 신라 유적의 흔적이 존재하는 것을 미루어보면 4세기로부터 5세기경 삼국 항쟁기에 청주 지역에 크고 작은 성이 수없이 많아야 했던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즉 청주 일대의 기름진 땅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각축전을 벌였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고장 민중의 고통을 헤아릴 만하다. 시계가 탁 트인 부모산성이 주변을 관망하고 경계하는 부모산성이 최적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부모산성은 청주의 지킴이로서 충분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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