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바지를 입은 19세기 위대한 여성화가 ‘로자 보뇌르’
[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바지를 입은 19세기 위대한 여성화가 ‘로자 보뇌르’
  • 충청매일
  • 승인 2019.07.1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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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의문: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
(5) 바지를 입기 위해 경찰의 허가를 받다

1883~1885년 역작 ‘마시장’ 가장 유명하고 기념비적 작품
빅토리아 여왕, 윈저궁 전시 부탁…美 상류층 컬렉터에도 인기
여성 해방을 위해 바지를 입느냐는 질문에 늘 단호하게 대처
단발머리·편안한 바지 차림 고수…독립심 잃을까 결혼 거부
작품 제작할때 따르는 전형적 사회적 갈등·모순 돌파에 노력
도판 1: 로자 보뇌르, '마시장', 1883(왼쪽). 도판 2: 자신의 정원에 있는 로자 보뇌르의 사진, 1890~1990년께.
도판 1: 로자 보뇌르, '마시장', 1883(왼쪽). 도판 2: 자신의 정원에 있는 로자 보뇌르의 사진, 1890~1990년께.

 

[이윤희 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이 그림을 보자.(도판 1) 검고 흰 말들이 흥분한 듯이 원을 그리며 뛰어다니고, 그 중 가운데 두 마리는 앞발을 들어 올려 사람들을 당황시키고 있다. 말의 고삐를 쥐고 있거나 등에 올라타서 감당이 안 되는 힘을 제어하려고 씨름하는 사람들도 여럿 보이지만, 명백히 이 그림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말이다. 성난 말의 팽팽한 근육, 흥분한 커다란 눈동자, 바람에 날리는 희고 검은 말갈기는 말의 야생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가로 507cm 세로 245cm의 거대한 캔버스는 말의 움직임들로 인해 파도치는 것 같은 격정적인 곡선의 리듬감을 보여준다.

아무런 정보 없이 이 그림을 보게 된다면 분명 ‘남성화가’의 것으로 오인되기 쉽다. 먼지가 풀풀 날리고 힘센 남성들도 제어하기 어려운 야생마들이 고삐를 뿌리치며 달리고 있는 마시장의 거친 장면을 통상 여성화가가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여성화가 로자 보뇌르(Rosa Bonheur)의 1883~1885년도 역작이다.

‘마시장’은 지속적으로 동물 그림을 그려 왔던 로자 보뇌르에게 각종 명성을 안겨주는 계기가 되는 작품이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자신이 기거하는 윈저궁에 이 작품을 전시해주기를 부탁해서 영국에도 보뇌르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결국 나폴레옹 3세가 구입한 이 작품의 가격은 각종 신문에 기사화될 정도로 고가였다고 한다. ‘마시장’을 비롯한 몇몇 대작들로 인해 로자 보뇌르의 명성은 미국에까지 퍼져 고정 컬렉터들이 형성되었다. 특히 미국의 상류층 컬렉터들이 열광한 이유는, 당시 유럽의 역사나 신화를 다룬 작품들이 새롭게 개척되는 신대륙의 기상을 담을 수 없었던 반면, 보뇌르의 동물 작품들은 야생의 힘이 넘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공가도를 달리고 국제적 명성을 얻었던 로자 보뇌르가 미술의 역사기술에서 온전히 빠져 있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작동했을 것이다. 보뇌르가 활동했던 19세기 중후반은 미술계가 새로운 이념을 생성하고 일종의 그룹활동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귀스타브 쿠르베가 사실주의 선언을 하고 그 직후에 인상주의 그룹이 빠르게 대중의 인정을 받으며, 인상주의 이후의 격정적인 아방가르드가 싹트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한 활동을 중심으로 역사가 기록되면서 부르주아 컬렉터들과 대중의 취향을 사로잡았던 로자 보뇌르의 작품들은 한때 유행한 단순한 동물그림으로 치부되어 미술사에서는 빠르게 잊혀졌다. 그녀가 당시의 살롱풍 역사화 전통을 배격하고 엄격한 사실주의 화풍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소재가 동물이다보니 후대에는 궁벽진 미술의 장르로 취급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많은 미술사가들에 의해 로자 보뇌르는 다시 한 번 주목되고 평가된다.

보뇌르의 동물 그림들이 지닌 가치에 대한 재평가 뿐 아니라 19세기에 그녀가 여성미술가로서 처했던 상황과 그것을 개인적으로 돌파하고자 했던 여정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보뇌르는 어쩌다가 동물을 자신의 소재로 삼았으며, 거대한 캔버스에 동물들의 격정적인 움직임을 이토록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로자 보뇌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로자 보뇌르의 아버지인 레이몽 보뇌르 역시 화가였으나 그다지 성공한 이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생시몽주의라는, 급진적 사회적 의제를 설파하는 일종의 유토피아 사상에 경도되어 있었는데, 인간해방을 실현하고자 하는 각종 의제들 가운데는 완전한 양성평등의 이념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이몽은 딸에게 여성이라는 성의 굴레에 갇히지 않도록 교육시켰으며 개인 미술학교를 열어 딸들을 교육시켰고, 그의 사후에는 보뇌르와 자매들이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양성평등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유토피아적인 전망일 뿐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개인적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남성의 에스코트 없이 혼자 돌아다닐 자유, 여성이 혼자 밤에 산책하고 공원의 의자에 앉아 쉴 수 있는 자유, 편안한 옷을 입고 긴 머리를 잘라 편안한 헤어스타일을 고를 수 있는 자유가 제한되었던 그 시대에, 로자 보뇌르는 바지를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동물들을 스케치하러 돌아다녔는데 이런 그의 행동은 ‘괴벽’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로자 보뇌르는 끊임없이 자신의 평범치 않은 외양에 대해 해명을 해야 했고, 명성을 얻은 뒤에 그것은 더한 굴레가 되었다. 하지만 보뇌르는 양성평등이라는 이념논쟁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녀는 인터뷰마다 자신은 원래 치마를 입고 여성적인 일에도 등한시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자신의 대책 안서는 곱슬머리를 아무도 손질해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머리를 짧게 머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으며, 치렁치렁한 치마를 끌고는 마시장, 우시장 같은 거친 환경에서 움직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바지를 입었노라고 ‘변명’을 한다.

당시에는 여성이 바지를 입고 길에 돌아다니는 것이 일종의 경범죄에 해당했기 때문에, 6개월에 한번씩 경찰서 주치의의 진단서를 들고 가 바지를 입어도 된다는 허가서를 받아야 했다. 움직이는 동물의 근육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동물의 해부학도 연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보뇌르는 자주 도살장을 찾아 흥건한 피웅덩이 속에서 스케치를 했다. 그런 장소에 바닥에 끌리는 긴 치마를 입어서는 도저히 운신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타당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바지 차림이 작업복일 뿐 다른 의도는 없으며 여성에게는 여성의 차림이 어울린다는 것을 알고 있고, 만일 자신이 남성처럼 보이기 위해 바지는 입었다면 옷장 안에 있는 저 수많은 치마를 왜 없애버리지 않았겠는가하고 반문한다.

보뇌르는 자신의 작품 이외의 것으로는 어떤 비난도 받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작품을 하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을 사회적 논쟁에 휘말리며 소모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성 해방을 위해서 바지를 입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늘 단호하게 대처했다. 일부러 다른 화가가 그리는 다른 초상화 속에서 드레스 차림으로 등장하고 사진을 찍을 때도 보란 듯이 치마를 입은 모습을 남겼다.

그러나 실제로는 말년까지 작업실에서건 집밖에 나가 스케치를 하기 위해서건 늘 바지를 입었고, 말년에 자신의 정원에서 찍힌 사진(도판2)에서도 평생 고수했던 단발머리와 편안한 바지 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을 즐겨 하고 남성용 안장을 올린 말을 타고 달리는 등의 기행이 늘 대중의 입에 오르내렸다, 사적인 자아와 공적인 자아 사이에서 큰 괴리감을 느끼고 늘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던 보뇌르는, 각종 의혹을 일시에 해소할 수도 있는 방법인 결혼조차도 거부했다. 그녀는 자신의 전기 작가에게 독립심을 잃을까 두려워 결혼을 하지 않았고, 너무도 많은 재능 있는 젊은 여성들이 마치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양처럼 스스로를 제단 위로 끌려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보뇌르는 일생 동안 여성미술가로서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제작할 때 따르는 전형적인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돌파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녀가 인터뷰들에서 늘어놓았던 변명이 오히려 그의 인생이 거쳐온 지난한 과정을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 바지를 입는 일이 그녀의 미술활동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는지는 그녀의 다음과 같은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 바지는 위대한 나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나는 바닥에 끌리는 치마 때문에 전통적으로 삼가되어 오던 어떤 종류의 일들을 과감히 해냄으로써 인습을 깨뜨렸다는 것에 자주 자축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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