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충청매일] 요 며칠은 정치권이 뜨겁다. 북남미 최고 권력자들이 판문점 한 자리에서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이 있었고, 여야가 뜨거운 관심을 갖고 있는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도 있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대내외 정국을 따라가기도 힘든 판국에 이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각이 진영에 따라 너무 극명하게 나뉘는 것도 신기하고도 안타깝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 남과 북, 그리고 미국과 중국이 잘 지내는 것이 서로 비방하고 싸우는 것 보다 더 좋은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의 정국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지?

정치권에서 자주 하는 말이 ‘내로남불’이다.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입장이 바뀌면 평가도 바뀐다. 오로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 같아, 그들에게 주권을 위임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화가 날때가 많다. 상대의 잘못이나 실수를 지적하고 바로잡게 도와주는 것은 좋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로 비난하는 것은 너무도 저급한 짓이다.

그런데 마냥 그들의 저급함을 비난할 수 도 없는 노릇이다. 필자도 때로는 지인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그런 비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무시하고 욕보이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필자의 말에 비난받았다고 생각하여 마음에 상처를 받곤 한다. 몇 번 이런 일을 겪다보니 저급의 비난과 진심의 쓴소리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쓴소리를 비난으로 오해받지 않고 할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졌다.

사전적으로 비난은 ‘남의 허물을 드러내거나 꼬집어 나쁘게 말함’이라고 한다. 쓴소리는 ‘듣기에는 거슬리지만 실제로는 유익한 말’로 정의한다. 어렵다. 나는 분명 쓴소리로 한 건데 상대는 비난으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제로 필자도 몇 년 전 충분히 친밀하다고 생각하여 쓴소리를 했다가 지금까지 관계가 어긋난 경험을 하고 있다.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의 쓴소리는 그리 어렵지 않다. 비난을 해도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좋은 의도 또는 비난의 목적이 아닌데도 상대가 다르게 듣는다. 사실 쓴소리를 한다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직장 상사나 동등한 위치의 동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쓴소리를 해서 관계가 어려워질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번 어긋난 관계는 다시 회복되기 어렵다.

필자에게는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용기는 있었지만, 용기보다 더 중요한 잘 전달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쓴소리를 들었을 때의 기분과 마음을, 쓴소리를 할 때 기억했어야 했다.

비난이 아닌 쓴소리는 꼭 필요하다. 기독교 최고 사도라 일컬어지는 바울은 잘못된 길로 가는 교인들에게 쓴소리를 서슴없이 했고 그 쓴소리가 성경의 일부가 되었다.

다만, 필자와 다른 점은 상대로 하여금 바울의 사랑을 느끼게 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기꺼이 변화되게 해주시고, 우리가 옳은 길을 갈 때에는 다른 이들과 함께 지내기 편한 존재로 만들어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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