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여성화가들끼리 경쟁 조장…주류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낳다
[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여성화가들끼리 경쟁 조장…주류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낳다
  • 충청매일
  • 승인 2019.07.07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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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의문: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
(4) 여성화가의 적은 여성화가?
프랑스 왕립아카데미 소속 비제-르브룅·라비유-귀야르
당대 최고 화가로 외모부터 실력에 이르기까지 비교 대상
1787년 아카데미 회원전에 걸린 작품, 경쟁구도에 정점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담 아델라이드 그림 나란히 전시
어지러웠던 궁정에서 편가르기 하며 경쟁하다 사라져
사진 왼쪽부터 비제-르브룅,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 그녀의 아이들’, 1787. 라비유-귀야르, ‘마담 아델라이드’, 1787
사진 왼쪽부터 비제-르브룅,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 그녀의 아이들’, 1787. 라비유-귀야르, ‘마담 아델라이드’, 1787

[이윤희 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우리는 지금까지 왜 역사적으로 위대한 여성화가가 없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위대한 화가가 되기 위해 영국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으나 끝내 역사화가가 되기 위한 마지막 단계인 누드수업에 배제된 이들을 보았고, 당대에 위대한 화가로 칭송되었으나 ‘못생겼다’는 불필요한 평가가 따라 다녔던 로살바 카리에라의 경우도 보았다.

지난회에 소개했던 로살바 카리에라는 후대에도 이름이 널리 회자되며 여성화가들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오늘 이야기 할 엘리제베스-루이제 비제-르브룅(Elisabeth-Louse Vigee-Lebrun)은 왕가의 전속이 되어 활동할 만큼 뛰어난 화가였기에 전시대 로살바의 후예로 칭송되기도 했지만, 미모로도 비교되었다. 전시에서 그녀의 작품을 본 한 시인은 이런 시를 썼다고 한다.

“르브룅, 아름다운 화가이자 모델.

현대의 로살바, 하지만 그녀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네.

파바르의 목소리와 비너스의 미소를 합쳐놓았으니.”

시인은 비제-르브룅의 용모에 대해 찬탄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비제-르브룅이 뛰어난 이유가 로살바 카리에라보다 더 아름답기 때문이라니. 이 시를 읽고 비제-르브룅은 크게 당황했다고 이후 자서전에서 회고했다. 어느 화가가 자신의 작품 대신 미모가 회자되기를 원했겠는가 말이다.

뿐만 아니라 비제-르브룅은 궁정에서 당대의 한 여성화가와 늘 비교대상이 되었다. 용모에서부터 그들이 주로 그리는 왕가의 사람들, 그리고 실력에 이르기까지 두 화가는 한 쌍의 귀걸이처럼 함께 회자되었다. 비제-르브룅과 늘 비교의 대상이 되었던 이는 아델라이드 라비유-귀야르(Adelaide Labille-Guiard)라는 화가였다. 두 사람 모두 ‘초상화가’ 부류로 입적되어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에 소속되어 활동했던 당대 최고 화가였다.

비제-르브룅은 아버지가 일찍 죽고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거의 독학하다시피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배우는 과정에서 파리의 화가들로부터 간간히 조언을 받기도 했지만, 화상(畵商)과 결혼을 하면서 집안에서 남편이 거래하는 과거의 명화들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이 그녀에게는 큰 축복이었다. 비제-르브룅은 점차 유명세를 더하며 결국 프랑스 궁정에 들어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화가로 성장하였다.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싫어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도 모델을 서는 과정에서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친구 같은 화가 비제-르브룅을 너무도 좋아했다. 화가로서 누구의 제자라는 계보가 따로 있거나 하지 않았던 비제-르브룅을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도록 밀어 넣은 것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였다.

비제-르브룅이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에 왕비의 압력으로 진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남성 아카데미 회원들은 다른 여성 화가를 추천해 균형을 맞추려 했다. 그것이 바로 아델라이드 라비유-귀야르였던 것이다. 라비유-귀야르는 비제-르브룅이 왕립 아카데미에 입성하던 바로 그 날 아카데미 회원으로 등록되었다. 이때를 시작으로 두 여성 화가는 끊임없이 비교당하게 된다. 비제-르브룅의 뛰어난 미모와 라비유-귀야르의 평범한 외모는 만만한 비교거리였고, 두 화가가 그리는 초상의 대상이나 그림의 솜씨 등도 늘 둘만의 경쟁으로 몰아갔으며, 심지어 두 사람의 그림은 아카데미 회원전에서 ‘나란히’ 걸렸다. 이 두 여성화가의 공통점이라면, 누군가 그녀들의 그림을 대신 그려줄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소문이었다.

1787년 아카데미 회원전에 나란히 걸렸던 비제-르브룅과 라비유-귀야르의 작품 두 점은, 둘의 경쟁구도에 정점을 찍는 사건이었다. 비제-르브룅은 당시 각종 추문에 휩싸여 있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배치하였다. 평소에는 리본이 수십 개쯤 장식된 화려한 실크 드레스에 여왕의 발그레한 볼터치를 닮은 핑크색 장미에 둘러 쌓인 모습으로 앙투아네트를 그렸지만, 이 시기는 오히려 그런 식의 화려함을 감추어야 했다. 왕비는 비교적 수수해 보이는 붉은 벨벳 드레스를 입고 세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다.

왕비에게 기댄 큰 딸은 어머니에 대한 친밀도를 드러내고 있고, 무릎에 안은 막내는 아기답게 활발한 동작을 보이고 있다. 오른쪽의 어린 왕자는 빈 요람을 열어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생후 11개월만에 결핵으로 사망한 둘째딸을 암시한다. 매일 무도회를 열어 국고를 낭비하고 문란한 생활을 즐긴다는 왕비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연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가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임을 감안할 때 왕비와 화가가 가졌던 위기의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제-르브룅의 왕비와 아이들 초상 바로 옆에 걸린 라비유-귀야르의 그림은 루이 16세 왕의 누이인 마담 아델라이드의 초상이었다. 비제-르브룅이 왕비가 총애하는 화가였다면, 라비유-귀야르는 왕의 고모나 누이들의 애호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마담 아델라이드는 루이 16세의 딸로 조용한 성품을 가졌으며 일생 결혼을 하지 않고 궁정에 머물렀다. 라비유-귀야르는 위기로 치닫고 있던 프랑스의 정황 속에서 기품을 잃지 않고 옛 미덕을 지키고 있는 왕가의 인물의 초상을 아카데미 회원전에 전시함으로써, 궁정에 대한 비난을 누그러뜨리는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림 속에서 마담 아델라이드는 단지 아름다운 옷을 입고 모델을 서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델라이드의 앞에는 자신의 아버지인 루이 16세와 어머니, 그리고 오빠의 얼굴이 옆모습으로 등장하고 있고, 이들이 중심을 잡고 있던 프랑스 왕가의 영광스러웠던 시절을 회고하는 듯하다.

결과적으로 비제-르브룅의 앙투아네트와 라비유-귀야르의 마담 아델라이드는 나란히 걸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람객들은 두 여성화가들을 비교하고 왕가의 두 여성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나누며 작품을 감상했다. 이 두 화가는 아마도 서로를 의식하고 경쟁자로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성 화가의 숫자가 적었던 시절에 함께 등장한 두 명의 여성화가를 여러 방면으로 비교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에 신물이 난 탓인지 몇십년 후에 씌어진 비제-르브룅의 자서전에는 라비유-귀야르의 이야기가 몇 줄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여성화가를 비교하느라 ‘여성의 적은 여성’과 같은 구도가 만들어졌고, 이 화가들이 당대의 남성 화가들과 비교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는 점이다. 당대의 중요한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야심을 가지고 노력하여 결국 궁정의 화가가 되었던 여성 화가들은 미술사에 남는 ‘위대한 화가’로 이름을 올렸기보다는, 혁명 전 어지러웠던 프랑스 궁정에서 편가르기를 하며 서로를 적으로 삼아 경쟁하다 사라졌던 두 여성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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