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열 칼럼]한국동란(韓國動亂)의 민간기록은 진실을 캐는 사료이다
[이세열 칼럼]한국동란(韓國動亂)의 민간기록은 진실을 캐는 사료이다
  • 충청매일
  • 승인 2019.07.02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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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디제라티 연구소장

[충청매일] 근세기에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최대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어느새 70년이 다 되어간다. 필자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다닐 적만 해도 6·25사변으로 불리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지금은 한국전쟁 또는 한국동란이라고 한다. 당시에 군번도 없이 조국을 위해 전쟁에 참여했던 15세 정도의 학도병들도 이제 80대 중반에 이르고 있어 차츰 전쟁의 아픔을 잊어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머지않아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한국동란은 남북이 통일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지금 국방부에서는 인민군을 포함해 전쟁이 치열했던 고지나, 좌익운동을 하다 집단으로 희생된 국민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학살 집단 매장지에 대한 유해발굴을 지속적으로 실시해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고 이들의 영혼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기록에 없는 유해발굴은 현재 생존해 있는 참전용사나 지역의 연로하신 분들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고 있다. 필자도 어린 시절 충북 보은의 어느 곳에 보도연맹원을 집단으로 학살해 매장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보도연맹이 무엇인지로 몰랐거니와 군인이나 경찰이 마을 주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한국동란 때 전사자가 누락되었거나, 학살 상황 등이 아예 처음부터 은폐돼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조사결과 사실로 증명된 사례가 부지기수이다. 이는 당시에 전쟁으로 혼란했던 상황에 기록체계가 미흡했고, 경찰 군대 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軋轢) 등에 의해 애꿎은 민간인들만 피해를 보거나 희생을 당했다.

지역주민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사태에서 판단하기가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간에는 군인이 점령했다가 야간에는 공산군이나 빨치산이 점령하는 양 갈래의 상황에서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돌아와 어떤 곳은 마을 자체가 사라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당시의 언론보도는 물론 군사정부의 통제로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민주정부가 시작된 이후에야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례는 비단 한국동란 뿐만 아니라 5·18 민주항쟁 역시 마찬가지이다. 광주사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는 물론 작전을 수행하거나 명령을 하달한 주역들이 가장 잘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비밀을 유지하고 있어 오리무중에 있다.

우리의 역사에는 정사가 있고 민간에 전해지는 야사가 있다. 그럼에도 어떤 때는 야사가 정사보다 더 신뢰를 주는 경우가 있어 이를 간과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기록문화의 나라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특히 민간 기록이 훼손과 망실의 속도에 있어서도 빠르다. 저명한 이들은 그나마 전시관이나 기념관을 세워 기록이 전해지기도 하지만 일반인은 사망과 동시에 버려지거나 태워져 아예 없어지기도 한다. 전하는 말에 노인 한 분의 기록은 박물관 1개와 견줄 정도로 시대의 스승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자치단체에서는 어르신들의 삶을 구술한 것을 채록해 기록으로 남기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사업에서 한국동란이나 광주사태의 진실이 조금이나마 발굴되었으면 한다. 이는 어느 특정기관이 아닌 우리 모두가 일기 모음이나 자서전을 펴내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릇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참여 했으면 한다. 특히 아직 발굴되지 못한 병영 일기는 역사에서 진실을 캐는 사료(史料)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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