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의문: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
(3) ‘여류’의 함정, 외모를 평가당하다

왼쪽부터 (도판1) 로살바 카리에라, ‘앙투안 와토의 초상’, 1721. (도판2) 로살바 카리에라, ‘겨울로서의 자화상’, 1730~1731. (도판2) 로살바 카리에라, ‘자화상’, 1746.
왼쪽부터 (도판1) 로살바 카리에라, ‘앙투안 와토의 초상’, 1721. (도판2) 로살바 카리에라, ‘겨울로서의 자화상’, 1730~1731. (도판2) 로살바 카리에라, ‘자화상’, 1746.

[이윤희 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나는 글의 맥락상 화가가 여성이라는 것을 특정할 필요가 있을 때는 ‘여류화가’ 대신 ‘여성화가’라는 말을 사용한다. 국어사전상 ‘여류(女流)’는 ‘어떤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여자를 이르는 말’이라는 해석이 붙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가 말하는 습관 속에 남아 있는 수많은 ‘여류’ 혹은 직군(職群)의 앞에 붙이는 ‘여(女)-’라는 수식어는 여성이 여러 분야에서 활동을 하기는 하되, 흔치는 않다는 점을 반증한다. 여류화가, 여류조각가, 여류소설가, 여류시인 등 예술직군에 붙는 ‘여류(女流)’라는 용어와, 여기자, 여의사, 여검사, 여선생, 여교수 등 수많은 직업 앞에 붙는 여자라는 특정은, 이러한 직업에 남성이 주(主)종사자라는 것을 일차적으로 말해 준다.

최근 들어 굳이 세보지 않더라도 학계와 법조계, 언론계에 여성의 비율은 상당한 수준으로 높아졌고, 예술의 분야는 더욱 약진하고 있는 추세로 보인다. 그런데도 직업 앞에 여성임을 특정하는 습관은 크게 나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자라는 수식어가 붙음으로써 직업의 전문성이 훼손되는 것 같은 느낌까지도 받게 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게다가 역사적으로 이 수많은 ‘여류’들은 그들의 미모에 대한 코멘트를 받아야 했다. 그림은 좋은데 못생겨서 그림을 의뢰한 사람이 실망했다거나, 너무 아름다운 여성이라 실력을 의심받거나 하는 일은 미술사에 흔하디 흔한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우리가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루벤스와 렘브란트 같은 위대한 화가들에 대해 얼마나 잘생겼는지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에 비교해본다면, 여성화가들의 미모에 대한 지나치게 많은 기록은 미술사 기술의 주체가 주로 남성이기 때문은 아닐까 의심이 된다. 외모에 대한 기록이 남은 화가, 로살바 카리에라의 작품을 보면서 여성화가에 대한 외모평가가 정당한 것인지 생각해보자.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베네치아를 기반으로 초상화를 그렸던 로살바 카리에라(Rosalba Carriera)는 전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이 줄을 서서 그림을 의뢰하는 스타급 초상화가였다. 그 당시에도 베네치아는 사육제와 가면축제, 오페라극 등으로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진기하고 흥겨운 도시였다.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왕족이나 귀족들은 로살바 카리에라를 방문하여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고, 그의 작품들을 구매했다. 그들 사이에서는 “아니, 베네치아까지 갔는데 로살바에게 들르지 않았단 말이야? 어이가 없는 일이군”라는 말들이 오갔다. 그만큼 로살바 카리에라는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화가였다.

로살바 카리에라의 인기 비결로는 그녀의 뛰어난 재능을 차치하고, 붓 대신 ‘파스텔’을 주요 매체로 사용했다는 점이 주효했던 것 같다. 유화 물감은 마르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파스텔은 그럴 필요가 없는 도구였다. 로살바는 파스텔을 이용해 사실주의적인 방식으로 대상의 특징을 아주 정확하게, 그리고 어느 누구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만큼 빠르게 구현하였다.

유화로 초상을 의뢰하면 화가 앞에 여러 날 앉아 모델을 서야 할 뿐 아니라 물감이 마르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그림을 받아올 수 있었다면, 로살바 카리에라가 그리는 초상화는 앉자마자 순식간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로살바는 훌륭한 작품을 그려내는 여성 화가들이 종종 시달려야 했던, 누군가 대신 그림을 그려주는 것 아닌가 하는 시기성 의혹에는 휘말린 적이 없다. 앉은 자리에서 결과를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과 덴마크의 왕 프리드리히4세, 작센 지방의 영주 프리스드리 아우구스트 2세 등이 로살바 카리에라에게 초상을 의뢰하였으며, 특히 폴란드의 왕 아우구스트 3세는 그녀의 그림을 157점이나 구매해 갔다. 늘 베네치아에 머무르던 로살바 카리에라는 다른 나라 귀족이나 궁정의 초청을 받아 유럽을 여행하기도 했는데, 특히 파리에서 그녀가 누렸던 인기는 대단했다. 이 지성적인 화가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많은 독서로 인해 박식해 대화를 이끌었으며, 악기 연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니 온갖 귀족들이 자신의 저택에 초대해 그녀의 재능을 사고 싶지 않았겠는가. 당시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화가였던 앙투안 와토도 그녀 앞에 앉아 미술에 대한 근본적인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한 바 있다.(도판 1)

그런데 앞서 말했다시피 로살바 카리에라를 기록들 중에는 그녀의 용모에 대한 ‘지적’이 종종 보인다. 오스트리아 궁정의 초청을 받은 로살바 카리에라가 빈의 궁전에 초청받았을 때, 그녀를 소개한 이에게 칼 6세가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베르톨리, 네가 데려온 여성 화가는 정숙한 여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별로 아름답지는 않구나.” 여성화가에게 재능 이외에 미모를 바랬던 것일까? 전 유럽을 매료시켰던 로살바 카리에라에게 무슨 무례하고 쓸모없는 평가란 말인가.

이 시점에서 로살바 카리에라의 자화상을 살펴보자.(도판2) 그녀의 자화상을 보자는 것은 그녀가 아름다운지 아름답지 않은지를 검증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평가가 과연 여성화가에게 왜 필요한가를 반문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생 동안 로살바는 몇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젊었던 시절부터 거의 실명에 이르렀던 노년에 이르기까지 인상적인 자화상들이 있지만, 여기서 소개하는 자화상은 56세가 되던 해의 자화상이다. 이때의 로살바 카리에라는 초상화가로 이미 명성을 얻었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해 백만장자가 된 상태였다.

차가워 보이는 검은 회색을 배경으로 해 빛을 받아 떠오르는 듯한 화면 속의 그녀는 파란색 벨벳 모자와 외투를 입었다. 모자의 의상에는 흰 담비 털 장식이 부드럽게 얼굴과 몸을 감싸고 있다. 화면 앞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매는 화가로서 살아온 연륜이 담긴 듯 날카롭고 통찰력이 있어 보지만, 위압적이거나 거만해 보이지 않는다. 오랜 시간 화면에 집중하는 표정을 지으며 얻었을 미간의 주름도 빼놓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살집이 있는 둥근 얼굴과 뭉툭해 보이는 코, 그리고 골격에서 배어나오는 턱의 쏙 들어간 부분도 그대로 그려져 있다. 입을 꽉 다물고 있지만 입꼬리에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실려 전체적으로 차가워 보이는 이 자화상의 분위기를 따스하게 살려 내고 있다. 노년으로 향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성공한 여성으로서의 자신감 역시 배어나오는 듯하다. 이 자화상은 그림 속 여성이 아름다운지 아름답지 않은지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고 있다. 오히려 그림 속 여성의 미모에 대한 평가를 떠나, 인격적 특징이 잘 드러난 초상, 자화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로살바 카리에라는 노년에 시력에 문제가 생겼고 70세 무렵부터 실명에 가까운 상태로 접어들었다. 화가에게 실명이란 너무도 치명적인 장애였고 더 이상 작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절망의 나날을 겪어야 했다. 눈이 멀어가는 초기에 그렸던 자화상(도판3)은 이 시기의 심경을 대변하는 것 같다. 50대 중반의 자화상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감이 차 있기보다는 어느 정도 우울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를 두른 월계관 장식은 자신의 일생에 부여하는 다독임처럼 보인다. 화가로서 일생을 살아 온 자신에게, 그리고 영광을 누렸던 자신에게 스스로 월계관을 씌워줌으로써 헛되지 않았던 인생을 스스로 치하하는 것 같다.

이렇게 로살바 카리에라의 일생 동안의 작업과 자화상들을 바라보며, 그녀가 아름다운지 아닌지에 대해 뒷말을 하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에 대한 의문은 더해간다. 안타깝게도 로살바 카리에라의 용모에 대한 세간의 한심한 평가는, 이후 여성 화가들이 겪을 외모지적들에 대한 시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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