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

[충청매일] 앞의 책을 쓰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의학 고전을 읽어야 했습니다. 제일 먼저 <황제내경>을 읽었습니다. 한문을 잘 모르는 저는 당연히 도서관에 가서 번역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한글로 쓰인 글을 읽는데, 뜻이 안 들어오는 겁니다. 눈은 읽어 가는데 머릿속은 텅 비었습니다.

다시 한 번 눈을 씻고, 이번에는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해서 하나씩 읽었습니다. 그제야 뜻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원문을 우리 글로 옮기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문장 구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경우도 많고, 심지어 주어와 서술어가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번역문을 읽는 것보다 원문을 읽는 것이 뜻을 이해하는 데 더 빠른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400쪽이 넘는 두꺼운 책들을 몇 권 그렇게 읽다 보니 분통이 터졌습니다. 같은 원본을 번역한 다른 책을 살펴보았습니다. 좀 더 나은 것이 있거나 좀 더 모자란 것이 있을 뿐, 상황은 같았습니다.

분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살펴보니, 이 어이없는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즉 이 원문을 번역을 한 분이 한문은 잘 아는데 정작 우리말은 잘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황제내경은 2천 년 전의 문장이어서 그 말이 가리키는 개념과 대상이 정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번역자들도 역대 주석가들의 의견을 주욱 나열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번역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즉 자신도 그 증상이나 처방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에 옛 명의들의 의견을 백화점 식으로 소개하고 마는 것이죠. 원문이 한글로 잘 옮겨지지 않는 것에 더하여,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조차도 불분명한 상황이 번역된 책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입니다. 황제내경을 번역하자면 우리말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과, 한자가 가리키는 대상을 알아야 한다는 두 가지 과제가 번역자 앞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번역한 책들을 읽으면서 번역상의 오류만 바로잡으면 좋은 책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내용은 이미 역대 명의들의 의견까지 드러난 상태입니다. 그래서 제가 글을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몇 달 동안 어수선한 번역 문장들을, 여러 책을 대조해가며 매끈하게 바로잡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내용이 한결 선명해졌습니다.

학민사의 양기원 사장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도 태어나는 것이 운명이듯이, 원고도 책으로 만들어지는 운명이 있다고! 청주에 들렀던 양 사장과 저녁을 먹으며 <황제내경> 원고 얘기를 했더니 대뜸 내주겠다고 해서 원고를 넘겼고, 결국은 두 권으로 나뉘어 책으로 나왔습니다. 『고려침경 영추』와 『황제내경 소문』이 그것입니다.

황제내경은 원래 2개로 나뉘었습니다. <소문>과 <영추>죠. <영추>는 원래 고려에서 진상된 <침경>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송나라 교정의서국에서 이것을 황제내경으로 편입시켜서 자신들의 것인 양 만든 것이죠. 송나라의 역사서인 송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추를 재편성하여 이름을 <고려침경 영추>라고 붙였습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