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의문: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
(1) 마지막 수업에서 배제되다

조한 조파니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 1771~1772.(오른쪽)안겔리카 카우프만 ‘미네르바 흉상과 함께 있는 자화상’, 1780.(왼쪽)
조한 조파니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 1771~1772.(왼쪽)안겔리카 카우프만 ‘미네르바 흉상과 함께 있는 자화상’, 1780.(오른쪽)

 

충청매일은 문화특집으로 ‘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를 기획, 미술역사를 여성의 시각으로 다시 씀으로써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다르게 보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의 집필자 이윤희씨는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미술전문지 기자와 공·사립 미술관 학예실장 등으로 일했으며, 현재 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으로 전시기획을 총괄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위인전 목록에는 훌륭한 인생을 살았던 각계 위인들의 이름이 있다. 문득 떠올려보면 나의 위인전 목록에는 위대한 장군들이 지나치게 많았다. 이순신, 권율 장군은 물론이고 강감찬, 을지문덕, 김유신, 최영 장군 뿐 아니라 한니발, 넬슨, 맥아더, 패튼 등 외국의 장군들에 이르기까지, 오! 이렇게 많은 장군들의 이름 뿐 아니라 인생스토리가 기억나다니 새삼 놀랍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 끄트머리에 태어나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시대적 분위기를 곰곰 생각해보면, 장군들이 지나치게 많았던 내가 읽은 위인전 목록은 아마도 군부정권 시절의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목표를 어떻게 실천한 무슨 직업의 사람이 위인으로 평가받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한 시대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즈음 위인전의 목록에 ‘나혜석’과 ‘프리다 칼로’가 있는 것을 보고 어쩐지 생소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작품 뿐 아니라 대단히 극적인 인생 역정으로 세간에 잘 알려진 여성 화가들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의지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낸 여성 예술가들이니 그들의 이름이 위인의 한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은 별로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왠지 그들이 ‘예술가’들 가운데서도 ‘여성 예술가’로서 위인, 즉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었다는 사실은 조금 의외이다. 이들 작품이 평가하기에 모라자라서가 아니라, 수많은 여성 예술가들 가운데 어떤 기준으로 이들의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함이 생겼다는 말이다.

위대한 화가나 조각가를 떠올리자면 당연히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다. 미술에 별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도 위대한 미술가로 입에 올릴만한 인물들, 예컨대 서양 미술사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뒤러, 루벤스, 렘브란트…, 우리나라로 오면 김홍도, 신윤복, 정선…, 현대로 오면 피카소, 마티스, 백남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여성 미술가로는 머리를 쥐어짜 기억을 더듬어보면, 신사임당이 그림을 잘 그렸다는 어디선가 들은 말도 생각나고 나혜석 같은 시대의 반항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생각나지만, 이름이 생각난다 해서 그들의 그림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여성이 미술가로서 위대하다는 칭송을 듣는 일이 흔치 않다는 것은, 여성이 미술 분야의 재능 면에서 선천적으로 열등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미술 분야 뿐 아니라 사회적 활동으로 분류되는 많은 분야들에서 역사적으로 여성의 두각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면 어쩌면 여성이 제분야에서 열등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도 생겨난다. 물론 이러한 의문에 대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여성과 남성에게 모든 조건이 동일했다면’이라는 조건이다.

다시 첫 의문으로 돌아가, 도대체 왜 우리는 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의 이름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단 말인가. 다시 말해 여성과 남성에게 있어서 미술에 접근하고 배우고 또한 전문적인 미술의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동등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질문을 미술사학이라는 영역에서 최초로 제기한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 대신 한 점의 그림을 제시한다.

조한 조파니(Johan Zoffany)의 ‘로얄 아카데미’라는 작품에는 영국 로열 아카데미 회원들이 등장한다. 수십명의 회원들은 작은 조각상과 부조, 그리고 초상화들이 있는 방에 모여 있다. 화면의 왼쪽에 앉아있는 옷을 입지 않은 두 명의 남자는 누드모델로 방 안에 있는 다른 인물들과 다른 신분임이 확연하다. 이러한 유형의 그림은 다름 아닌 집단 초상화이다. 사진술이 아직 발명되기 이전에는 가족사진 대신 가족초상을 그렸고, 졸업사진 대신 졸업초상화를, 같은 직업군 사람들의 기념사진 대신 기념초상화를 그렸다.

한 시기의 유대관계를 기록하는 이와 같은 집단 초상화는 어느 직군에서나 일반적이었고, 영국 로얄 아카데미, 즉 왕립 미술원의 일원들이 누드모델을 놓고 인체를 연구하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이들은 모두 남성이다.

그런데 이 시기 왕립아카데미의 기록에는 분명 두 명의 여성이 설립단원으로 함께 존재했다. 안겔리카 카우프만(Angelica Kaufmann)과 메리 모저(Mary Moser)라는 두 명의 여성 미술가가 이들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스위스 태생이었던 카우프만은 영국에 정착한 후 장식적이면서도 고전적인 화풍을 구사하며 귀족들의 초상화가로 환영을 받았고, 이미 영국 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얼굴이 이 집단초상화에 없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초상화를 그리던 날 이들이 결석을 했을까? 아니면 영광스러운 왕립아카데미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숨기고 싶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런데 그림의 오른쪽 벽면을 보면 두 명의 여성 초상화가 보인다. 왼쪽에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이가 안겔리카 카우프만, 측면상으로 그려진 이가 메리 모저이다. 이 그림에 두 명의 여성 회원들은 남성 모델을 관찰하는 이 수업에서 실제로 배제되었다. 남성들의 벗은 신체를 보는 것이 여성들의 그릇된 욕망을 자극해 교양을 해친다는 이유에서였다. 누드 수업에서 두 명의 여성을 배제하고 집단초상화까지 남기게 된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들은, 어쩐지 양심에 약간 찔렸던 것이 아닐까 싶다. 마치 졸업사진 찍을 때 사정상 결석한 학생의 단독 사진을 전체의 사진 속에 어색하게 끼워 넣어주듯이, 카우프만과 모저는 이 장면 속에 초상화로 끼워 넣어졌다. 카우프만과 모저는 이 누드수업에 참가하지 않아도 위대한 화가가 되는데 지장이 없었을까?

적어도 안겔리카 카우프만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스위스 출신 프레스코(회벽에 수채로 그리는 그림) 화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유럽 전역을 여행했고, 특히 이탈리아에 머무르며 로마 시대의 작품들 뿐 아니라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고전들을 실제로 보고 숙련기를 가졌으며, 영국으로 건너오기 전에는 로마에 있는 유명한 성 루가 아카데미(Academy of Saint Luke)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카우프만은 영국으로 와서 왕립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면서 유명한 화가가 아니라 ‘위대한 화가’가 되기 위해 한 발을 내딛은 참이었다. 이 당시 ‘위대한 화가’가 되기 위해 누드수업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이 시기는 꽃그림이나 초상화가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나 종교와 신화 등을 소재로 하여 거대한 규모의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어야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화면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 화가는 인체의 다양한 포즈에 따른 근육의 움직임 등을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의 인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그 위에 옷을 입혔을 때 자연스러운 동작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결정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수업에 안겔리카 카우프만은 참여할 수 없었다.

조그만 초상화로 벽에 걸려 있는 안겔리카 카우프만의 얼굴을 제대로 보자. ‘미네르바 흉상과 함께 있는 자화상’에서 카우프만의 얼굴은 고요하면서도 생기에 넘친다. 작은 스케치판을 들고 그림을 그리다가 막 덮은 듯한 그녀는 그림 그리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머리 뒤쪽에 천을 두르고 비교적 편한 옷을 입고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 있다. 카우프만의 옆에 놓인 지혜와 과학, 예술의 수호 여신인 미네르바(아테나)는 투구를 쓴 전사의 모습이다. 매우 평범해 보이는 화판을 들고 있지만 카우프만은 그리스 로마 신화속의 여신인 미네르바를 자화상과 함께 배치해 고전에 기반을 둔 화가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카우프만은 초상화가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 그녀의 역사화 속 인체 비율에 문제가 있다는 등의 비판과 여성으로서 넘보면 안 될 선을 넘어 그의 남편이 기가 죽겠다는 등의 조롱을 뒤로 하고, 카우프만은 많은 역사와 신화의 장면들을 그림으로 남겼다.

이제 질문을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위대한 여성미술가는 없는가” 대신에 우리는 “여성미술가가 남성과 동등하게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는가”라고 말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