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충청매일] 얼마 전부터 나는 시장엘 자주 가게 되었다. 아내의 장보기를 거들어 주려고 해서이긴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먹을거리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평소 장보기에 큰 관심도 없었고, 아내가 해주는 음식에 별다른 불만이 없던 나로서는 시장에 먹을거리가 그렇게 많은지 새삼 놀라웠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시장 음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느새 아흔을 훨씬 넘기신 어머니는 올해 들어 부쩍 입맛이 없어 하시며 몇 술 뜨다 말기 일쑤였다. 아내는 집에서 잣죽이나 녹두죽을 끓여 드리기도 하고 유명한 죽집에서 전복죽을 사오기도 했다. 나 역시 어머니가 드실 게 뭐 있을까 부지런히 찾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어쩌다가 어머니의 입에 맞는 음식이라도 얼마 가지는 못했다. 시장을 돌면서 문득문득 어렸을 때 입이 짧은 나를 좇아다니며 밥을 떠먹이곤 하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자꾸만 생각나곤 했다. 뭘 좀 사가면 좀 드실까 고민하는 것이 나에겐 하루 중 가장 큰 일과의 하나였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난 어느 날 뜻밖에 큰 매형님이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대상포진에 불면증까지 겹쳐 병환에 시달리신다는 거였다. 누님은 매형님 간호에 정신이 없으시다고 하였다. 어머니도 식사를 제대로 하시지 않는 데다가 매형님까지 편찮으시다는 소식이 겹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생은 장모님과 장인어른 상을 겹쳐 당하는 일까지 있던 터라 모든 게 그저 뒤숭숭하기만 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나와 우리 가족은 어머니 식사 챙기기에, 누님은 매형님 간호에 매달려 하루하루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큰매형님 생신일이 부득부득 다가오고 있었다. 생일 가족 모임을 못할 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도 되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께서 식사를 조금씩 다시 하시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소식을 카톡을 통해 수시로 누님과 동생에게 알리곤 했다. 어머님이 조금이라도 음식을 드시는 날은 그저 기쁜 날이었다. 큰 매형님도 차츰 회복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럴 즈음 소식을 들은 조카들도 어머니를 뵙기 위해 다니러 왔다.

드디어 큰매형님 생일 모임 날이 되었다. 어렵게 식당에 모인 우리는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물론 어머니도 그 모임에 참석하셨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자리에 참석하신 작은 매형님이 본인도 20여일간 병원에 입원했다가 당일 퇴원하여 가족 모임에 참석한다고 하셨다. 어머니 식사 때문에, 큰 매형님 병환 때문에 정신이 없던 우리는 작은 매형님의 말씀을 듣고 미처 챙기지 못한 죄스러움이 크기만 했다. 어쨌든 우리 가족은 그렇게 병고를 이기고 생일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연이어 상을 당하여 황망한 가운데도 겨우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동생 내외도 참석하였다.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주며 덕담을 건넸다. 그러면서 차려진 음식 그릇이 점점 비워지고 있었다.

가정의 달 5월은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 시련을 안겨주었고 또 이를 극복해 내는 지혜와 용기도 함께 주었다. 우리는 가족들의 얼굴을 서로 살피며 건강을 걱정하고 염려해 주는 것으로 생일 모임을 가질 수도 있었다. 연로하신 어머니와 병마에 시달렸던 두 매형님, 그리고 상을 당해 큰 아픔을 겪었던 동생 내외는 가족의 얼굴을 서로 확인하며 서로가 위안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요즘도 여전히 아내와 함께 시장을 찾는다. 그리고 어머님이 보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기원한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