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청주예총 부회장

[충청매일] 2차 대전에 참전한 프랑스 군인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포화 속에서도 틈틈이 파스칼의 <팡새>를 읽음으로써 불안한 마음을 다스렸다고 한다. 기독교인에겐 <성경>이 있고, 무슬림들에겐 <코란>이 있다. 청소년들에겐 <명심보감>을 권하고 싶다. 나도 요즘은 <대승기신론(大乘 起信論)>과 땀을 흘리며 2년째 씨름(?)을 하고 있다.

대승이란 우리의 마음을 뜻한다. 대승심(大乘心)은 ‘큰마음’으로서, 시간적으로는 영원하며, 공간적으로는 무한한 우주적 마음이다. ‘진여(眞如)의 마음’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이 좌우된다. ‘대승심’은 이기적인 마음으로만 쓰지 말고, 남도 배려하며 사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쓸 것을! 그러면 무한한 공덕이 있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무수한 생명들을 ‘중생’이라고 한다. 어원적으로 ‘중연소생’(重緣所生: 무수히 많은 인연에 의해 태어난 생명들)의 준말이다. 일체 중생을 내 몸과 같이 생각하는 ‘동체자비’의 마음이 ‘대승심’이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 캠퍼스는 아주 넓은 대지에 수목이 아주 울창하다. 교내의 숙소를 나서면 대 운동장과 가로수가 울창한 도로가 ‘쭉!’ 뻗어 있다. 거기를 걷다보면 귤나무 밭이 나온다. 아마도 1만여 평은 족히 됨직한 대지에 줄을 맞춰서 조림된 것이라서 보기가 시원스럽다.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칡넝쿨에 덮이어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곳을 지나는데 보기가 민망스럽다. 그때마다! 사자가 다섯 마리가 물소 한 마리의 등에 올라타 공격하는 영상이 떠오른다.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물소의 울름 소리가 가련하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다. ‘콩 한쪽이라도 함께 나눠 먹자!’는 취지에서 사회주의가 출발했다. 나와 남을 구별 말고, 마음을 넓게 쓰자는 동체자비의 ‘대승심’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막상 중국인들은 어떠한가? 정작 이들은 자기와 상관없는 일은 전혀 관심이 없다. 계단에 먹다 남은 컵라면 그릇이 버려져 도, 운동장에 모래사장에 풀이 나서 자라도, 칡넝쿨이 귤나무를 덮었어도! 누구 하나 관심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이때 생각난 것이 ‘대승심’을 내가 몸소 실천에 옮기기로 맘을 먹었다. 시장 철물점에 가서 ‘니엔또우!’라고 외치니 낫을 준다. 나흘 간 방학하는 날을 택하여 작업을 착수했다. 우선 나무에 덮은 넝쿨만 해 치우는데 나흘이 꼬박 걸렸다.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 문득, 정말 윤동주는 대단한 천재 시인이구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란 구절리 떠 올랐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사랑해야지! -> 대승심으로 모든 중생을 사랑해야지!」 모든 생명은 숙명적으로 죽기 마련이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자! 이것이 ‘대승심’이요 ‘시심’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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