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철 수필가]

길동씨를 길거리에서 마냥 기다리게 할 수만은 없어 화장도 하지 않은 부스스한 얼굴에 편한 옷차림으로 달려 나왔다. 비상등을 깜빡이고 있는 승용차가 있어 다가갔더니 나를 첫눈에 알아보고 ‘빵’하고 클랙슨을 울린다. 외관은 낡아 보였는데 차 안은 의외로 깨끗했다. 가지런히 놓인 휴지통 하며,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시트커버 등은 주인의 깔끔한 성격을 말해주는 듯했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미안해요.”

“아니요. 진주씨를 만난다는 설렘으로 잠 한숨 못 자고 나왔어요.”

“어머! 거짓말도 잘하시네요.”

“믿지 못하시는군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미안해요.”

흔하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은 어제 짐작했지만, 오늘도 역시 내 예상을 깨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길동 씨도 등산용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소탈해 보이는 그의 어깨가 어쩐 일인지 믿음직스럽게 느껴졌고 빈말이 아닌 것 같았다.

내부순환도로를 벗어나 한강을 건너자 꽉 막힌 도로는 짜증을 불러왔다. 길동 씨가 오디오 버튼 누르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도 역시 노래는 ‘해변의 여인’일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한때 유행하던 ‘가방을 든 여인’이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저 곡은 연상의 여인과 연하의 남자 사이에 이루지 못한 로맨스를 그린 영화 주제곡이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몰래 가서 저 영화를 보고 눈물 바람을 하고 온 기억이 생생하다.

길동씨도 나도 음악을 들으며 말을 아끼고 있었다. 아니 딱히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어물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내 가슴 아픈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남이섬은 빼곡하게 들어찬 버스와 승용차가 유명 관광지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길동씨가 익숙하게 앞장 서 저만치 가고 있다. 내가 노래방 도우미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그러는 것일까 하는 노파심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평정심이 찾아왔다. 그렇게 옹졸해보이지도 않았고 또 내가 노래방 도우미를 할 망정 사회나 길동씨에게 비난 받을만한 짓은 하지 않았으니 내 스스로 떳떳하다고 생각해서다.

길 옆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잎이 환상적이다. 얼마 만에 밟아보는 시골 들녘인가. 들판을 가득 메운 만삭의 몸이 부끄러운 듯 고개 숙인 벼이삭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어머님의 품에 안긴 것처럼 편안하다.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앞서가던 길동씨가 주춤 걸음을 멈추고 단풍잎을 따서 나에게 건네주며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진주씨 고향도 시골인가 보네요?”

“네, 어떻게 알았어요?”

“척하면 삼천리라고 진주 씨표정만 봐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죠.”

자신에 찬 목소리다. 전혀 피곤하지 않은 듯 보였다. 또 슬슬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니에요. 길동씨 고향이 시골이니까 지레짐작으로 넘겨짚은 것 맞죠?”

“어! 어떻게 알았어요?”

“척 하면 삼천리라고 길동씨 표정만 봐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죠.”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요. 남의 말 따라 하면 표절이에요. 표절!”

“호 호 호 표절? 그럼 취소할게요.”

“와! 내가 1승 했다.”

정말 승리에 도취한 어린아이처럼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려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표정이다. 전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사람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 길동 씨가 나랑 보조를 맞춰 나란히 걷는다. 누가 보면 선남선녀쯤으로 보였을 거다.

천천히 걷는 발걸음은 모터보드가 시원스레 물살을 가르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둑으로 향하고 있었다. 둑에 늘어선 은행나무 잎이 약간 노란 색을 띄고 있다. 길동씨가 메고 있던 배낭에서 야외용 돗자리를 꺼내며 나를 바라본다.

“이곳에서 좀 쉬었다 갈까요?”

“그래요. 이제 은행나무도 머지않아 노랑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하고 있네요.”

“어! 맞아요. 진주씨의 그 말은 시인(詩人)들이 자주 쓰는 말인데요. 혹시 문인?”

“아뇨. 길동씨의 ‘표절’이란 말이 냉철한 평론가의 일침으로 들려서 나도 한번 해봤어요?”

“하하하 이번에는 내가 한방 얻어맞았네요. 자 앉습니다.”

길동씨가 배낭에서 주섬주섬 꺼낸 것은 사과와 과도였다.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과도를 받아들고 사과를 깎아서 일회용 접시에 담았다. 치밀한 것인지, 아님 소심한 것인지 요지까지 꺼내놓는다.

“10여 년 전 그 날도 그랬어요. 여기 어디쯤에 누나와 앉아서 과일을 먹었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 때에도 이곳을 자주 놀러왔었군요?”

안동에서 올라와 직장생활을 하던 길동씨가 서른 세 살 되던 해 자주 가던 일곱살 많은 꽃집 주인을 누나라 부르며 따랐다. 처음에는 손님과 주인 사이로 만났지만, 자꾸만 여인에게로 끌려가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해 결국에는 청혼까지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는 독신주의자라고 하며 사랑에는 철저한 장벽을 둘러쳤다.

“가끔 여기에 놀러오면 누나는 내 손을 꼭 잡고 이 길을 걸었어요. 어쩌다가 혼자 앉아있는 수심이 가득 찬 모습을 보고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하곤 했었어요.”

회사에서 일본에 출장 갔다가 열흘 만에 돌아온 일이 있었는데 꽃집 여인은감쪽같이 모든 것을 정리해서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너무 허망했다. 아니 배신감까지 들었다.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질 수 있을까. 어렵게 수소문하여 그녀의 행적을 좇아가긴 했는데, 어느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싸늘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과 이미 불꽃 속에서 한 줌의 재로 피어났다가 차디찬 강물에 떠내려간 다음이었다. 사인은 백혈병이었다고 했다.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방황하던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꽃집 여인의 동생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편지 한 통을 내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니는 길동씨가 어떻게든 찾아올 것이라며 이 편지를 꼭 전해주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전해주지 않으려 했지만, 부탁이 너무 간곡하고. 언니의 삶이 불쌍해서 마음을 바꿔 먹었어요.”

편지에는 자신도 길동 씨를 좋아했지만, 이미 병이 깊어 누구에게 사랑을 나누어 줄 만한 세월도 남아있지 않아서 모질게 거절했다는 말과 함께 착한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가라는 내용으로 끝을 맺었다.

“어머! 어쩜.”

나는 머리가 멍한 게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는 해서 그를 위로하긴 해야겠는데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꼭 소설 같은 이야기이네요.”

“그렇지요. 나는 그 후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줘보지 못했어요. 그 누나가 첫사랑이었거든요, 지금도 누나의 환상을 쫓아다닐 때가 많아요. 어제 진주 씨를 처음 보는 순간 누나를 보는 듯했어요. 시기상조라고 하겠지만 감히 진주씨에게 내 일생을 맡기고 싶었어요. 받아주십시오?”

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정말 저 사내를 믿고 내 일생을 맡겨도 될 수 있을까?

“제가요?”

“네. 즉흥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밤새 생각해봤는데 그 누나랑 이름이 똑같은 진주씨가 그 자리를 대신해 줄 적임자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길동씨가 힘주어 또박또박 말하는 것을 듣고는 더욱 난감했다. 만난 지 이틀 만에 하는 청혼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길동씨는 나 보다 세 살 적은 마흔 둘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초혼에 실패했고 초등학교 다니는 딸까지 있는 몸이다. 이 자리에서 내 의사를 밝히기엔 길동씨의 표정이 너무 진지하다.

“고맙기는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이야기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 곳 구경이나 해요.”

내가 먼저 일어나 길동씨의 손을 잡았다. 정말 내 일생 길동씨에게 맡기고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내 처지를 안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송보라가 강진주가 된다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길동 씨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내 옆에 바짝 따라붙으며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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