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석
한국교통대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충청매일] 책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인가를 알아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안이하게 세상에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생각하는 연습도 할 수 없다. 생각도 하지 않게 되고 일상적인 판단이나 태도로 기존의 습관을 반복하거나 누군가를 모방하는 생활방식을 취한다. 이외로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다른 사람을 흉내 내면서 한편으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매뉴얼이나 실용적인 기술로 대처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매뉴얼이나 실용적인 기술은 기계를 다루는 데는 유효할지 몰라도 인간이 관여된 일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당연히 독서에도 실용적인 기술 같은 요령은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최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책 읽기 기술은 당연히 있을 수 없지만, 타인의 독서 방식이 참고가 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방식을 안다고 해서 자신의 독서 의욕이 배가되자는 않는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는 누구도 대답할 수 없다. 책을 읽을지 말지는 오로지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렸기 때문이다.

독서는 생존 욕구 자체는 아니지만 뇌의 굶주림을 채워 준다는 의미에서 생존 욕구에 가까울 수 있다. 뇌의 일부는 생각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뇌가 태어나면서부터 오랜 옛날에는 지금처럼 책이 없었다. 고대에는 구전과 전승에 의해 보존의 역사가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귀에서 몸으로 들어왔다. 이야기를 통해 계승돼 온 내용은 단순히 과거나 조상의 사례뿐만 아니라 윤리나 생활 방식을 포함한 종합적인 서적 같은 것이었다.

고대인들은 선조로부터 이어 온 이야기를 그저 재미로만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역사가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뭔가를 간파했을 것이다. 간파는 멍하니 듣기만 하는 태도로는 불가능하다. 이는 말이나 문장 속에서 어떤 의미를 캐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뭔가를 간파한다는 것은 더욱 고도한 작업이다. 독서가 인간의 머리를 활발하게 만드는 것은 이 간파라는 형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간파를 행할 수 있다. 그런데 책과 마주했을 때는 거기에 적혀 있는 주제나 정보, 지식만 선택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일이 책을 읽는 게 귀찮아진다. 시간을 두고 책을 읽기보다 재빨리 인터넷으로 찾은 정보로 요점을 간추리고자 한다. 이는 자신의 주변 세계를 조잡하고 작은 가상세계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 세계를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화폐가 여러 장소에서 가치를 갖게 된 현대에 와서 인간은 가치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금전적인 가치로 환산하고도 그것이 정말 잘못됐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만연해 있다. 전혀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성질의 대상을 비교하는, 이상한 금전 환산을 솔선수범해 수행하는 것은 정부와 공무원이다. 그들은 세금을 들여 진지한 얼굴로 전업주부의 노동력이 어느 만큼의 임금에 해당하는지 계산해 발표하기도 한다. 국민들은 그와 똑같은 짓을 흉내 내고 있다. 독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중요한 암시를 작은 목소리로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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