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통대학교 행정학과

[충청매일] 탈무드는 “질투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라고 하고 있다. 그렇듯 사랑을 주제로 하는 모든 드라마에는 항상 질투와 시기가 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시기와 질투심은 종종 그들이 죽어야 끝난다. 그 줄거리를 보면 시기 질투하는 마음은 남들보다 집안사람끼리 더 심하다. 똑같이 거지는 거지를 시인은 시인을 질투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려는 것을 질투라 한다. 비슷하게 남이 잘되는 것을 샘하여 미워하는 것을 시기라 한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시기와 질투심이 큰가? 일반적으로 천재나 스스로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이 시기가 많고 질투심이 강하다고 한다.

천재 발명가 에디슨은 자기보다 똑똑한 테슬라의 교류 발전기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직류식 발전기를 강조하면서 테슬라를 자신의 회사에서 쫓아내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한 앙숙의 관계였다.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완성된 뒤에 어느 곳에 설치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에서 다빈치는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서로가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우연히 만나기만 하면 싸움을 하였다고 한다.

똑똑한 사람들의 집단인 대학에 능력 있는 사람을 채용하기 위해서 특별 채용제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그 내면을 보면 자기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는 교수들의 특성이 영향을 준다. 우리나라 몇몇 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특별 초빙 교수로 채용하지만 초빙 목적을 제대로 달성한 대학은 거의 없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저명한 교수가 국내 대학에서 전임교원으로 임명되어도 2~3년을 버티지 못하고 소리 없이 다른 곳으로 간다. 매스컴이나 대중적 인기를 가진 교수가 대학 내에서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철학자 러셀은 “민주주의의 기초는 질투다”라고 한다. 질투는 도전을 가져오고 도전에 대하여 응전을 한다. 그렇게 사회는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질투가 개인의 명성을 위한 질투가 되고 패거리를 형성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면 그 질투와 시기는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

스스로 똑똑한 집단이라고 하는 정치인들은 시기와 질투의 화신들이다. 상대당이 잘 나가는 것으로 보지 못하고, 대중의 인기를 얻는 정치인이 등장하면 깎아 내리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반대 집단을 형성하여 매스컴에 등장하고자 한다. 버나드 쇼는 “정치가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라고 한다. 우리의 정치가들은 스스로 똑똑한 집단이라고 이름붙이고 시기와 질투를 공익으로 포장을 한다.

그러나 정치가 에디슨과 테슬라,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간의 시기 질투가 아닌 아침 드라마처럼 시기 질투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난다면 드라마 보듯 재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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