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그런데 북진은 말 할 것도 없이 관아가 있는 읍내 청풍도가에도 그런 세물전이 없었다. 그래서 큰일이 있을 때마다 청풍 인근 사람들이 먼 충주까지 가 물건들을 빌려오곤 했다. 신덕기는 마을의 대소사는 물론 일 년에도 몇 차례씩 지내는 향교 향사를 지내온 터리 그 고충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는 약초도 많이 나는 곳이니 약초전은  꼭 만들어야 할 것 같소이다.”

“잡철전도 하나 만듭시다.”

“그 외에 살림에 필요한 잡화점도 있어야하지 않겠소이까?”

객주들이 그동안 장사를 하며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상전들을 일일이 거론했다. 그러나 객주들이 거론한 상전들만으로 사람들 살림살이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조달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모자라는 것은 차차 채워나가면 될 일이고, 우선은 사람들이 매일처럼 써야하는 물건들을 취급하는 상전부터 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먼저 싸전부터 정합시다. 싸전은 누가 했으면 좋겠소이까. 객주님들 중에서 싸전을 해보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

“내가 한 번 해보겠소이다!”

최풍원의 물음에 박한달이 싸전을 해보겠다며 나섰다.

“나도 해볼테요!”

박한달에 이어 장순갑도 싸전을 해보겠다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땟거리도 없어 질질 매던 놈이 돈 좀 있나베!”

“그렇게 지독하게 남의 물건을 후려쳐 원성을 사더니 이젠 싸전까지 넘보는구만!”

객주들의 뒷말처럼 싸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쌀은 사람들이 매일처럼 먹어야 하는 곡물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새가 먹새’라는 말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먹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었다. 먹새 중에서도 가장 많이 먹는 것이 쌀이었다. 그러다보니 싸전에서는 항상 많은 쌀을 창고에 쌓아두어야 했다. 그러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돈만 많다고 싸전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싸전을 하는 장사꾼은 고을 사정에도 밝아야 했다. 고을 사정뿐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소문에도 귀가 열려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세에 맞춰 쌀을 수급할 수 있었다. 돈도 있어야하고 귀도 밝아야하지만, 무엇보다도 장사꾼에게 필요한 것은 후함이었다. 더구나 사람들이 먹는 곡물을 취급하는 장사꾼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푸근하게 느끼도록 후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은 각각 일장일단을 가지고 있었다. 박한달은 후하기는 했지만 후하다보니 퍼주기를 좋아해 선친의 뒤를 이어 오랫동안 장사를 했음에도 모아놓은 재산이 별반 없었다. 그에 비해 장순갑은 장사를 한 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남의 눈물을 짜내며까지 지독하게 장사를 한 까닭에 택택하게 재산은 모았지만 박한 탓에 고을민들로부터 많은 욕을 얻어먹고 있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쌀은 모든 물건의 기준이 되었다. 이 말은 곧 싸전이 북진여각의 얼굴이라는 말과도 같았다. 싸전의 쌀값에 따라 장터의 수많은 물건들 값이 정해졌다. 그러니 싸전에서 잘못하면 장터의 다른 상전은 물론 북진여각에도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북진장터 싸전에 박한달, 장순갑 두 객주가 하겠다고 나왔소이다. 어떻게 결정했으면 좋겠소이까?”

최풍원이 다른 객주들의 의견을 물은 것은 도중회의라는 공적인 자리이기도 했지만 장순갑이 싸전을 맡는다는 것이 탐탐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순갑이 싸전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다른 상전에 비해 싸전은 안정된 장사일 뿐만 아니라 이득도 한결같았다. 아무리 살림이 곤궁해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게 사람이었다. 입성은 남루하고 집안 꼴은 허술해도 살 수 있지만 허기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 뭐라도 있으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발길을 하는 곳이 싸전이었다. 싸전은 고을민들의 목줄이었다. 그런 싸전을 장순갑이 맡게 된다면 똥줄기가 빠지게 다급한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해 어떤 짓을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잖아도 지난 번 북진본방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청풍 고을민들을 위해 풀어준 구휼미도 다른 임방주들과 달리 장순갑은 고리로 빌려준 사실을 최풍원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장순갑이 청풍도가를 은밀하게 드나들고 있다는 사실도 동몽회원들을 통해 듣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아직 확실한 증자를 잡지 못해 장팔규를 시켜 뒤를 밟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장순갑에게 북진여각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싸전을 맡길 수는 없었다. 최풍원의 고민이 깊어졌다. 최풍원은 속으로 박한달을 싸전 객주로 점찍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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