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새벽이 열리기 시작하는 길을 가고 있다. 미명아래 하나둘씩 깨어나고 있는 주변 풍경들이 시야에 어린다. 분주한 일상을 내려놓고 떠나와 길 위에 설 때면 철따라 시시때때로 변하는 산야의 풍경들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세월의 때가 끼어 무디어진 감성들이 깨어나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오늘 나와 마주한 길가의 풍경들은 자우룩이 내려 쌓이는 눈꽃들을 품어 안으면서 환호하는 대지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풍요로웠던 생명들을 떠나보내고 난 뒤의 텅비어버린 들녘은 허허롭기 그지없었고 알몸으로 서있는 나목들은 안쓰러울 만큼 남루해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 메마른 땅위의 모든 것들 위로 새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한 순백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섭리는 순리를 거스르는 법이 없다. 겨울의 끝자락인 지금은 계절의 순환에 따라 봄이 올 준비가 시작되고 있는 때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쏟아져 내리는 하얀 눈발은 하늘의 축복이다.

지난 겨울 내내 불어대던 모진 칼바람을 견뎌 낸 나목들에게나 품안에 품었던 수많은 생명들을 내려놓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고 있는 대지 모두에게 있어 축복이다. 눈이 그치고 백설이 뒤덮인 대지 위로 햇살이 들면 저들은 소리 없이 녹아내려 땅 속으로 흘러 들 것이고 대지의 품안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던 생명들은 때를 알고 찾아와 가만가만 스며드는 생명수로 마른 목을 축여가며 힘찬 태동을 시작 하리라.

눈발을 헤치며 오가는 수많은 이들이 있어 오늘도 길은 여전히 북적대고 있다. 그들이 풀어놓은 갖가지 사연들로 해 늘 질펀하다. 겹겹이 쌓여지는 이야기로 점점 두터워져가고 있다. 길이 처음 만들어 졌을 때는 하나의 구조물에 불과 했지만 그 위에 삶의 흔적들이 쌓여 감으로 생명이 되었다. 길이 살아 숨 쉼으로, 길 위에 삶에서 비롯되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녹아듦으로 역사를 이루어 냄이다.

길은 열려 있다. 어느 곳을 통해서가도 목적지에 갈 수 있다. 가고자 하는 곳만 확실하다면 언젠가는 도착하게 마련이다. 좀 돌아서 갈지라도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때로는 돌 자갈들이 어지러운 비포장도로를 가기도 하고, 길이 평탄치 않아 웅덩이에 고인 물 때문에 흙탕물을 뒤집어쓰며 가야 할 때도 있다.

비탈에 설 때도 있고, 가로등도 꺼져 버려 칠흑 같은 어둠을 헤쳐 가느라 방향을 잃기도 한다. 주변 풍경이 너무 삭막해 가슴속으로 황량한 바람이 불어오기도 하지만 이런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탁 트인 고속도로를 갈 때도 있고 시야에 어리는 것들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차오를 때도 있다. 그 곳에 그 길이 있었기에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악천후를 동반한 험난한 삶의 길이었을지라도 되돌아보면 속살을 여물리는데 한 몫을 하지 않았던가.

삶이란 그리 호락호락 한 것도, 도저히 지고 갈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것도 아니다.

때로는 무게를 감당 할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의 절망감에 휩싸이기도 하고, 너무 만만히 여긴 탓에 때를 놓쳐 허둥대기도 하지만 마음만 다잡으면 길이 있게 마련이다.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이기에 가보지도 않고 포기해도 될 만큼 무가치하지 않다.

‘삶은 그냥 꾸역꾸역 살아내는 일이고 자신의 산소통은 자기가 지고 가야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매스컴을 통해 얼핏 스쳐간 말인데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가끔씩 떠올라 되새겨지곤 한다. 삶을 만홀히 여기는 이들을 향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의식이 팽배해가는 이 시대를 향한 일갈(一喝)이 아닌가 싶어서다.

내 삶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가 숨쉬기 위해 내가 지고가야 하는 산소통을 누군가에게 대신 지우려 한 적은 없었는지 돌이켜본다. 먼 길을 걷고 뛰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너무 무거워 그만 벗어버리고 싶어 안간힘 할 때가 왜 없었으랴. 덕지덕지 달라붙어 심신을 옥죄는 것들에서 놓여나고 싶어 삶이라고 하는 것을 패대기쳐 버리고 싶을 때도 수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로 감당하기 힘들었던 짐을 걸머지고 용케도 여기까지 왔다.

삶의 종장(終章)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삶이라고 하는 길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갈팡질팡 허둥대며 걸어 올 수밖에 없는 길이었을지라도 오기를 참 잘 했다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그 분이 허락한 생(生)이 다하는 날까지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리라 다짐한다.

사람살이가 힘들어 가슴 속으로 시린 바람이 불어와 너무 힘들 땐 잠시 쉬기도 하며 쉬엄쉬엄 가다보면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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